슬픔의 5단계 중 분노
1. 내 밭이 지저분하다고요?
유방암 수술에서 회복하고 있던 동안 집도의 선생님이 오셔서 수술 경과를 말씀해 주셨다. 수술 부위는 크게 출혈이 있거나 하지 않아서 고름이나 혈액을 빼낼 배액관도 필요 없었고 또 요즘 새로 나온 수술용 접착제로 마무리해서 실밥흉터도 없고 아물기도 잘 아물 것이라고 했다. 보통 수술이라면 크게 절개해서 수술용 실로 꼼꼼히 꿰매는 것이 수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부위도 아니고 암 수술을 한 부위를 접착제로 마무리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기도 하였다.
암이라는 특성상 수술로 암조직을 꺼내서 조직 검사를 해야 암세포가 어떤 단계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역시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전이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겨드랑이에서 4개의 림프를 떼어내어 조직 검사한 결과 전이가 된 것 같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유방암 1기로 확정 진단받게 된 것이다. 또한 혹시 유전적 원인이 있을까 싶어 떼어낸 암 조직을 유전자 검사를 하기로 하였다. 조직 검체를 미국으로 보내고 1주일 정도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데 비용이 600만 원 정도 하였지만 그 돈이 아깝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건강을 해쳐 가면서 열심히 모은 돈을 나의 건강에 쓰지 않으면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던 것 같다. 집도의 선생님은 또한 내가 이해하기 힘든 말씀도 하셨다. 내 유방암 부위를 수술하다 보니 속된 말로 ‘밭이 지저분했다.’는 것이다. 지저분하다? 과연 무슨 말씀이지? ‘지저분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장소나 또는 무엇이 마구 이리저리 흩어져 보기가 나쁘고 더럽다.’ 그렇다면 내 유방암은 이리저리 흩어져 더러운 형태였다는 말씀일까?
몇 시간 후 집도의 선생님을 보조했던 선생님이 다시 오셨다. 아까 집도의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에 질문이 혹시 있는지 여쭤보셨고 나는 “네. 밭이 지저분하다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보조 선생님은 유선 조직이 매우 촘촘하고 치밀하다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혹시 한국어가 서툴러서 이해를 못 할 수 있을까 생각하셨는지 영어로는 “Proliferation”이라고. 아! 내 유선 조직은 정신없이 세포분열하는 스타일 같다는 말씀이었다. 내 담당 의사 선생님은 매우 친절하시고 실력도 뛰어나신 분이셨는데 그분이 유방암 환자에게 ‘밭이 지저분했다’ 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의료진이라서 그렇게 설명하셨던 것 같다. 아무튼 내 지저분한 밭을 일구고 정돈해 주신 고마우신 분이었다.
2. 퇴원의 기쁨
엄마의 말씀으로는 나는 수술 후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엄마는 외과 병동에서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하셨던 프로 간병인이셔서 내가 필요한 부분을 귀신같이 잘 알아차려서 간호해 주셨다. 나는 제한이 많은 병원 생활이라 불편할 만도 했을 텐데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에서 느끼는 안도감 때문인지, 엄마의 극진한 간호 덕분인지 식욕이 돋고 잠이 마구 쏟아졌다. 역시 회복에는 잘 자는 것과 잘 먹는 것이 최고이다. 다만 수술에 쓰인 마취제의 후유증으로 변비가 생겨서 수술 후 3일째 화장실을 가지 못 해서 불편했다. 그래서 산책 시간을 좀 더 늘려서 엄마와 함께 병원 이곳저곳을 산책했다. 너른 하고 큰 대학병원은 외래 환자들이 많지 않은 저녁 시간에는 정말 산책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었다. 병원을 산책하다 보니 이따금씩 내가 병에 안 걸렸다면 한 달 후 이런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말이다.
산책시간을 늘린 덕에 드디어 화장실을 갔다. 매일 아침 화장실 가셨나요 여쭤보는 간호사 선생님의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하자 다음날이면 퇴원해도 되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입원 수속은 복잡하고 설명이 많은 반면 퇴원 수속은 돈을 내니 금방이었다. 총병원비는 내가 입사 1년 후 샀던 입생로랑 가방의 3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지만 시원하게 카드를 긁었다. 정말이지 병원비야말로 아깝지 않았다.
퇴원 후 오랜만에 아빠를 만나 셋이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집으로 향하는 차 밖 풍경은 며칠 전과 비슷한데도 생경했다. 병원에서 5일 정도 있었을 뿐인데 그 사이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인지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 석방된 느낌이었다. 복작거리는 거리, 7월의 초록초록 잎들, 따가운 햇볕, 약간의 미세먼지가 섞인 공기의 냄새… 항상 있지만 그렇기에 소중함을 몰랐던 아름다움들이 다시 한번 느껴지며 내가 일상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음을 체감했다.
3. 8회의 방사선 치료
퇴원 한 달 후부터 8회의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었다. 방사선 치료 시작일은 8월 2일이었다. 시댁에서 머물고 있는 남편이 방사선 치료날이면 친정으로 와서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8번 중 2번 정도를 빼고는 남편이 항상 함께 가주었고 그날은 우리의 데이트날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몇십 년 만에 폭염이 온 그 여름이었어서 치료를 받는 한 달이 정말이지 험난했다. 방사선 치료 시작일에 방사선사가 수성 매직 같은 펜으로 방사선을 방사할 부위를 그려주는데 최대한 지워지지 않게 씻어야 했다. 펜으로 그려진 부분은 최대한 조심조심 닦아야 해서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35도가 넘나드는 땡볕 더위에 방사선 치료를 받고 집으로 오면 너무 더워서 흘린 땀에 조금씩 펜이 지워져서 속옷에, 옷에 파란 잉크 자국이 묻어났다.
8회의 방사선 치료는 더위가 수그러들지 않던 9월 초까지 계속되었다. 방사선 치료를 받다 보면 여러 환자들을 대기실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각자 방사선 치료를 받는 부위가 다양한 것 같았다. 그래도 대부분의 여자 환자들은 준비하고 있는 가운 차림으로 보아 유방암 치료를 받는 분들이 많았다. 대부분 50대-70대의 여자분들이었다. 나는 매번 치료를 받을 때마다 내가 이 중에서 가장 어린것 같으면 조금 우울해졌고 나만큼 어려 보이는 환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위안이 되었다. 한창 일하고 커리어를 쌓아가야 할 30대에 모든 걸 중단하고 암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 아주 자주 짜증 나고 서글펐다.
4. 나의 화풀이 상대로 당첨된 남편과 아빠
나는 수술 후 타목시펜이라는 호르몬억제제를 복용해야 했는데 아이 생각이 있는 나와 남편은 난자를 동결하기로 상의해서 수술 후 바로 타목시펜을 복용하지는 않았다. 암이 그 사이 재발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약으로 인해 내 난자의 활동이 정지되기 전에 난자 동결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재발의 공포를 억눌러야 했다. 8회의 방사선 치료 후 나는 총 2회의 난자 채취를 시도했다. 배란일에 맞추어서 며칠 동안 같은 시간에 주사를 배에 찔러서 맞는데 환자들에게 주사는 잘 놓는 나이지만 내 배에 찌르는 주사는 손이 떨려서 잘할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남편이 어떤 날은 엄마가 도와주었다.
난자 채취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회는 난자가 1개가 나왔는데 그리 좋은 상태의 난자가 아니어서 실패했고 2회 차에는 난자 2개를 채취했고 그중 1개는 남편의 정자와 수정을 성공하여 동결시켰다. 보통 난자 채취를 하는 과정에서 20개 이상의 난자가 채취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1개 아니면 2개의 난자밖에 나오지 않았다니 슬펐다. 회복실에 누워있을 때 옆 환자는 난자가 11개밖에 안 나왔다며 간호사 선생님과 대화 중에 펑펑 울었는데 “저기요! 여기 난자 1개밖에 안 나온 사람 있으니 조용히 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이 시절 나는 알 수 없는 분노가 많이 쌓였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의 통제력이 닿지 않는 인생살이에 허무하고 답답해진 것 같다. 무엇보다 그 화가 쏟아진 대상은 친정 아빠와 나의 남편이었다.
남편은 나 때문에 미국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왔다. 나의 보호자가 되어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던 남편이 한국의 부모님 댁에 있다 보니 나의 남편은 나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시부모님의 보호자였다. 이 마음이 뻥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암 수술을 마치고 몇 주 후 어느 주말, 시누이네 가족과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시누이네 가족 넷은 이미 만나기로 한 스타필드 몰에서 구경하며 기다리고 있었고 남편이 나와 만나서 같이 가기로 하였다.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남편은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걸자 남편은 “자기야, 엄마가 할머니네 가시는데 지하철을 타고 가신대서 데려다 드리고 가려는데 할머니가 밥솥이 고장 나셨다는 거야. 그래서 당장 밥솥을 사야 하거든? 그래서 이것만 사드리고 금방 갈게. 한 20분 정도 더 걸릴 거야. 누나한테는 내가 얘기할게!”
20분을 기다렸는데 아무 연락이 없어서 또 연락을 해보니 “길이 막혀서 아무래도 1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 미안해!”라고 했다. 남편의 말에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지금 조카들 배고플 텐데 그럼 먼저 형님한테 전화해서 식사하시라고 해야겠어. 함께하는 식사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미리 선약을 형님네와 한 건데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으니 자기가 설명을 잘해야 할 것 같아. 어머님을 도와드리고 싶으면 미리 나와 형님네 얘기를 했어야지… 그러면 이게 더 급한 일이니 식사는 다음에 하자고 했던가 아니면 아버님한테 연락드려서 밥솥을 사서 할머니 댁으로 오실 수 있냐고 여쭤보던가 무슨 계획을 같이 세웠을 거 아니야. 함께하는 일정이 있는 날에 혼자서 결정해서 통보하면 기다리는 사람들은 서운하잖아.”
남편은 분명히 나를 돌보기 위해 일을 포기하고 한국에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에 온 후 남편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들은 지금의 가족이자 아내이며 환자인 나를 우선시하는 게 아닌 원가족인 시부모님을 우선시하는 것 같아 실망이 컸다. 물론 나도 해외에 오래 살아서 부모님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남편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 타인의 사정을 어림짐작해서 본인이 생각할 때 옳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점이 여기서 터져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나뿐만이 아닌 시누이 가족에게도 어떠한 상의가 없어서 나와 시누이 가족들 모두 우왕좌왕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부부가 서로 소통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야말로 남편이 "남의 편"이 된 기분이었다. 이 사건이 지금까지도 우리 부부와 시누이 가족이 모이면 가끔 이야기하는 ‘밥솥 사건’이다.
한편 아빠는 위암 수술을 몇 년 전 받으셨던 ‘암 선배’였다. 분명히 엄마 말씀으로는 아빠가 수술 후 담배와 술을 끊었었다고 했는데 최근 1년 전부터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하셨고 담배도 다시 피우셨다고 했다. 아빠는 아빠방에서 방문은 닫고 창문을 열어두고 담배를 피우셨는데 그 담배 냄새가 문 틈으로 새어 나와 찌릿하고 머리 아픈 담배 냄새가 새어 나왔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천식으로 매년 몇 번씩 고생을 좀 했었는데 캐나다에 가고 천식이 고쳐진 것은 아빠의 담배에서 멀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유학을 간 후 방학이 되면 한국에 올 때마다 아빠의 담배 냄새는 전혀 그립지 않은 과거의 찌질하고 볼품없는 나의 모습을 기억나게 했다.
암 수술을 하고 집에 와서 1주일 정도 후부터 아빠의 담배 냄새가 아주 많이 신경 쓰기 시작했다. 난자 채취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아빠에게 그만 화를 내고야 말았다.
“아빠! 담배 좀 제발 그만 피우면 안 돼? 아빠 위암 수술하고 별로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빠 살려준 의사한테 이게 할 짓이야? 아빠가 지금 담배 피우는 거 자살행위야! 그리고 나도 유방암 수술받고 집에서 요양 중인데 왜 자꾸 집에서 담배를 피워? 나도 같이 죽이려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 아빠가 죽음을 감수하고 담배를 피울 거면 혼자서 나가서 피워! 엄마랑 나랑 매번 집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애원했잖아! 나 정말 화딱지 나서 여기서는 요양을 할 수가 없어! 집에서 나가서 숙소에 있어야겠어!”
나는 그렇게 말을 내뱉고 짐을 싸서 다음 날 호텔을 잡아서 그곳으로 갔다. 엄마는 말렸지만 나는 도저히 친정에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과 딸을 해하려는 것 같은 아빠의 담배는 유방암을 수용하고 다시금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나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행위였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숙소에서 지내면서 우울한 며칠을 보냈다.
이런 와중에 남편은 본가 가족들과 여행을 갔다. 나는 친정에서 나와 난자 채취를 위해 주사를 맞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정작 나의 보호자로 왔다는 나의 남편은 내 곁에 왜 없는 것일까? 혼자서 가장 힘든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이 상황이 한없이 서러웠다. 이윽고 나는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조금씩 하게 되었고 나의 반응에 놀란 남편이 황급히 달려왔다. 나는 내가 서운한 이유들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부부 상담을 제안했다. 부부 상담을 받아보고 이게 정말 내가 불합리하게 서운한 것인지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상담사와 상담을 시작하자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와 억울함을 분출했다. 사실 암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암으로 인해 정지된 나의 커리어, 내 일상이 정지되었지만 나머지 가족들, 특히 암 환자 취급을 안 하는 아빠의 배려 없는 행동들, 그리고 보호자로 왔다는 남편의 보호자 같지 않은 남의 편 같은 태도… 이 모든 것들이 쌓이고 쌓여 끝없는 분노의 용광로를 불지피고 있었던 것이었다.
유방암 환자임을 수용하는 듯했던 저는 수술을 받고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으면서 엄청난 분노를 경험했습니다. 고구마를 만 개는 먹은 것 같은 가슴 콱 막히는 답답한 그 기분을 겨우 참으며 씩씩하게 치료를 받고 있던 중에 아빠와 남편에게 서운했던 것이 자극되면서 제 안에 꾹 참고 있던 암에 대한 화도 폭발한 것 같아요.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 제가 화를 내어도 묵묵히 그 자리에 있어준 아빠와 남편에게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시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지금은 화나고 고통스럽지만 다 지나갈 거라고, 터널 끝에 보일 한 줄기 빛이 꼭 기다릴 거라고 위로해드리고 싶어요. 새해에는 우리 모두 무탈한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