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다른 상처를 가진 오빠
1. 내가 유학을 온 사이 오빠의 이야기
오빠는 내가 캐나다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 모교에서 석사, 그리고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한껏 받았던 나와는 달리 오빠는 장학금을 받으며 최상위권 대학교를 다녔고 박사까지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은 한 푼도 받지 않은 그야말로 K-장남이었다. 이후 대기업에 취업하여 새언니를 만나서 결혼을 할 때도 부모님으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훌륭한 성취 뒤에는 많은 상처와 어둠이 드리워져있었다. 본인을 버리고 여동생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버린 엄마,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 직전에 발생한 부모님의 이혼준비와 파혼의 걱정, 예단을 교환하지 못할 정도로 차이나는 경제적 수준. 거기에 본인과는 반대로 집안의 지원을 독차지한 여동생 때문에 본인 몫의 결혼 축의금까지 뺏겨야 했던 냉혹한 현실. 나와는 다른 방향에서의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던 게 결혼 전까지의 나의 오빠였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려면 “17화 미국 유학이 가져온 마음의 빚”에 실려있으니 본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무사히 끝낸 오빠와 새언니. 그들의 신접살림은 오빠의 직장인 지방도시에 차리게 되었다. 그렇기에 새언니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연고지 없는 지방에서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했다. 아마도 타국으로 이민 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오빠의 유년기 시절에 워킹맘이었던 엄마에게 사랑을 충분히 못 받고 자란 탓인지 오빠는 새언니가 주부로 지내주기를 바랐다. 남편 직장 따라 아는 이 하나 없는 지방에 내려와서 주부로 살고 있는 새언니가 나는 좀 안쓰럽게 느껴졌다. 성격이 괴팍한 오빠가 새언니의 마음고생을 시키지는 않을까 많이 염려했다. 새언니는 말수가 없는 편인 데다가 시부모님과 시누이가 함께 있는 자리이면 더더욱 말을 아낀 채 짧은 식사만 하고 금방 집으로 내려갔다. 새언니와는 1년에 한 번 정도 식사만 하는 정도라 더욱더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느끼기에 새언니는 시부모님에게 싹싹한 며느리는 아니었어도 나는 새언니를 참 좋아했고 안쓰러워했다. 무엇보다 성격이 모난 오빠와 잘 살아주는 것이 고마웠던 것 같다.
오빠와 새언니가 결혼한 지 몇 년 후 오빠는 갑자기 직장에서 실직했다. 오빠가 다니는 회사에 유부남인 상사가 어떤 직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 것을 의심한 오빠는 근무 시간 외에 상사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친한 동료 직원에게 그 얘기를 했는데 아마 그 동료가 고발을 한 모양이었다. 감사팀에서 여러 조사를 받으면서 노무사와 얘기도 해보고 하였지만 결국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생각에 자발적 퇴사라는 이름의 권고사직이 되었다. 아빠의 외도 사건으로 부모님이 이혼 위기에 갔던 그 시절을 겪은 오빠에게 상사의 외도는 참기 힘들었던 것 같다. 이 사건 이후 동종업계에서 평판이 나빠지게 된 오빠는 재취업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오빠는 실직자로 지낸 1년 동안 처가에는 아직 직장을 잘 다니고 있는 것처럼 연기했고 본가에 와서야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는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생활비에 보태라며 오빠에게 조금씩 용돈도 주었다. 엄마는 나에게 아들의 실직이 꼭 부모의 탓인 것만 같아서 죄책감을 느끼셨다. 결혼할 때도 집을 마련할 때 한 푼도 보태주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도 큰 목돈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엄마는 오빠가 아픈 손가락이었다. 해준 것은 한 푼 없지만 가정을 이루고 잘 살기를 바랐던 아들이 부모님 사이에 일어난 외도 사건을 겪고 차마 상사의 외도를 눈감고 지나치지 못해서 실직을 당했으니… 엄마의 심정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오빠는 전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드디어 재취업에 성공했다. 전셋집에서 자가로 옮기면서 처가에서 몇 억을 주신 덕택에 오빠네 형편은 조금 나아지는 듯 보였다. 처가에서 지원을 받은 것을 알게 된 엄마는 처가에 잘 하라며 오빠에게 신신당부하고는 했다. 엄마에게는 늘 더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한 아들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오빠는 부모님이 동생에게 금전적 지원을 몰아준 것이 서운한 것 같았다. 그리고 처가에서 큰돈을 주실 때마다 오빠는 더욱 자존심이 떨어졌을 것이다. 양가 중 한쪽에서만 금전적 지원을 받다 보면 덜 지원을 받은 쪽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게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그 누구보다 자신감 있던 오빠는 아마 와이프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오빠와는 왕래를 거의 하지 않아서 엄마를 통해서 오빠 부부의 소식을 들었는데 오빠는 엄마에게 자주 “엄마! 이거 와이프가 싫어해” 하며 엄마가 오빠에게 주는 선물이나 음식들을 미리 사양하고는 했다. 그 대화 안에서 억눌린 엄마의 서운함은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금전적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엄마가 나는 늘 안타까웠다.
2. 백수인 암 환자가 돌 선물을?
나와 남편의 바쁜 한국에서의 일상이 막바지에 다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남편은 1년의 반을, 또 나는 봄부터 여름, 가을을 한국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에 나는 병원에 내원해서 받는 치료는 다 마쳤다. 중간에 남편과 여행도 한 번 갔다 왔다. 칠순을 맞으신 아빠의 생신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고심해서 고른 드레스와 턱시도를 빌려 입고 우리 부부의 웨딩 촬영도 했다. 결혼식 준비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끝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2주 정도 전부터 우리 부부는 숙소에서 헤어져서 각자 본가에서 시간을 지내기로 했다. 곧 다시 떠나게 된다고 생각을 하니 모든 시간이 아쉬워지고 있었다. 특히 나의 부모님께 후회되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덜 화를 낼 걸… 조금이라도 더 밥을 같이 먹을 걸…’
내가 지난봄에 한국에 입국하고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만났던 오빠와 새언니는 내가 미국에 들어가기 전에 또 한 번 만나고 싶어 했다. 곧 딸이 돌인데 가족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돌이 조금 안 된 조카를 키우느라 서울에 자주 못 오는 오빠 내외여서 남편과 나, 부모님과 2시간을 달려 오빠네 가족을 만나러 갔다. 새언니는 미니멀리스트이고 아주 깔끔한 사람이다. 조카가 생기기 전에 갔었던 두 사람의 집도 깔끔했지만 애가 사는 집인지 의심이 될 만큼 여전히 깨끗했다. 정말 필요한 물건들만 있었다. 거실에 깔린 쿠션 매트와 조카의 장난감 몇 가지만이 이 집에 사는 아이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오빠는 내가 갑자기 암 수술하고 회복하느라 고생했다며 맛있는 걸 사주었다. 오빠는 따뜻한 말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라 오빠가 나한테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눈물이 나올 뻔했다.
엄마는 곧 돌을 앞둔 조카에게 줄 선물을 그간 차근차근 모으셨다고 하면서 오빠와 새언니에게 주었다. 돌잔치를 안 한다고 하여 미리 선물을 준비하신 것이었다. 몇 달 전, 내가 한국에 온 지 별로 안 되었을 때, 그러니까 암 진단을 받기 전에 오빠네 집에 갔을 때 오빠가 나에게 “다음에는 미국에서 선물 안 가져와도 돼. 네가 가져온 거 와이프가 다 버리니깐 아무것도 가져오지 마.”라고 했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오빠네에게 정이 떨어진 데다가 실직자가 된 나였기에 이번에는 빈 손으로 갔다. 내가 고심해서 주는 선물은 다 버려지고 싫어한다고 하니 뭐 무슨 선물을 가져가겠는가? 새언니는 엄마에게 받은 선물들을 그 자리에서 다 뜯어서 박스와 포장지를 착착 펴고 접어서 금세 버리고 알맹이만 쏙 방으로 가져갔다. 역시 깔끔한 새언니다. 나는 그런 언니의 깔끔한 성격이 참 부러웠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정리정돈부터 해야겠다며 자극을 듬뿍 받았다. 그리고 오빠같이 성격이 괴팍한 사람과 살아주는 것을 내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르겠다.
오빠와 새언니의 합작인 나의 조카는 정말 부모를 공평하게 닮은 아이였다. 몇 달간 금세 자라서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 고사리 같은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지면 마음이 뭉클해졌다. 트림을 해도 똥을 싸도 조카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쳐다보고 있으면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이 경이로웠다. 어떻게 이렇게 천사 같은 조카가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조카를 재우러 새언니가 방으로 들어가고 아빠는 담배를 피우시러 밖에 나가시는 동안, 식탁에는 엄마와 나, 남편, 오빠가 남았다.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오빠는 연간 핸드폰만 보고 대충 듣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오빠가 좋아하는 알타리 김치를 이번에 담그면 좀 보내줄까 하고 물어보셨다. 오빠는 “아니야 엄마! 김치 가져오지 마! 둘 다 위가 아파서 김치를 잘 못 먹어. 와이프가 다 버린다니까…”
하지만 나는 아까 새언니가 “저희 언니네가 사준 거예요!” 하면서 자랑하며 열었던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보았었다. 내 생각에는 그냥 엄마의 김치가 부부의 입에 안 맞는 것 같았다. 오빠는 엄마의 알타리 김치를 참 좋아했었다. 결혼하고 나니 지금은 입맛이 바뀌었나 생각했다. 그 얘기를 들은 엄마의 표정은 약간의 섭섭함이 엿보였지만 투머치토커인 우리 엄마는 금세 다른 토픽으로 넘어가셔서 얘기를 하셨다. 나는 집에 가면 엄마한테 엄마 알타리 김치 나한테 달라고 말해야지 생각했다. 그렇게 오빠네 가족과의 가족 식사는 마무리되었고 나는 곧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엄마를 통해서 들은 오빠의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오빠가 말하기를 와이프가 고모는 조카 돌 선물도 안 주냐면서 서운해하는 눈치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뭐지? 오빠는 나에게 분명 나의 선물들은 버려진다고 했었다. 나는 매년 한국에 나올 때마다 가족들 선물을 고심해서 주었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오빠네 가족 선물은 마음에 드는 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들을 생각하고 준비하느라 나는 보통 몇 달을 준비한다. 내가 아는 한에서 선물 받을 사람이 가장 좋아할 만한 것들로 고른다. 새언니가 버린다는 나의 선물들은 나의 사랑과 정성을 듬뿍 들어간 선물이었다. 불필요한 물건을 비우고 버려야 직성에 풀리는 새언니의 미니멀리스트 성향상 나의 선물들이 간택을 받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대놓고 나의 선물들이 버려진다는 말을 들으니 서운함이 컸다. 아니 고심해서 고른 선물을 버린다는데 안 서운해할 사람이 있을까? 선물을 사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사갔더니 지금 와서 자기 딸 돌 선물이 없다고 서운해한다.
3. 옛다! 돌 선물 받아라!
나는 남편과 상의하여 포토금패를 무리해서 샀다. 돌반지를 해야 했겠지만 병원비부터 결혼 준비 비용 등등으로 너무 많이 까먹어 버려서 통장 잔고는 이미 바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 선물을 하지 않으면 평생 욕을 먹을 것 같아서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 만들어낸 일종의 타협점이었다. 직접 갖다 주기에는 미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져서 택배로 보내야만 했다. 사실 시간이 있었어도 직접 가져다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빠는 새언니가 선물을 맘에 들어한다면서 고맙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나의 서운한 마음을 전하고자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나는 이제 죽을병에서 살아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어안이 벙벙하고 내가 재발의 걱정 없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그래서 내 마음 추스리기 바쁜 상황에 오빠가 미국 가기 전에 들르라고 해서 갔고 돌 선물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나는 오빠가 내 상황을 알기도 하고 또 돌잔치를 하는 게 아니니 내가 선물을 줄 거라고 오빠네가 기대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 물론 사돈댁에서 비싼 선물들을 자랑하고 엄마와 내가 준 선물은 폐기처분하는 새언니의 마음에 들 만한 선물을 줄 형편은 못되지. 나나 남편이나 수입이 없게 된 지 6개월이 넘었잖아. 오빠도 엄마아빠한테 받은 게 없어서 많이 서운했고 그동안 힘들었을 거야. 근데 나도 오빠 몫까지 지원을 받아서 그만큼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항상 나를 갉아먹고 있어. 물론 그 덕에 미국 약사가 되어 성공적으로 정착했지만 대신 얻게 된 마음의 병을 치료하려고 이제는 나 자신을 더 많이 돌아보고 사랑하고 부모님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분리하는 연습도 하고 있어. 그리고 일찍 암을 발견해서 은총이라고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서럽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마음이 밀려올 때면 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아. 원가족과 새 가족 사이에 껴서 힘들지? 나도 결혼하고 나니 오빠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네 또 오빠가 원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잘 회복하고 행복한 남편이자 아빠가 되기를 응원할게.
그러자 오빠에게 답장이 왔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썼겠네. 나도 아기까지 태어나서 매일 정신이 없네. 내가 서운하다는 게 아니라 와이프가 처가 쪽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우리 집에서는 이만큼밖에 못 한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해서 이번에는 엄마가 준 돌팔찌를 너랑 엄마가 같이 준비한 걸로 이야기한다고 했더니 엄마가 너는 나중에 따로 할 거라고 했거든. 전달 과정에 오해가 있어서 서운했을 것 같아. 너희도 팍팍하다는 건 잘 알고 지금도 헤쳐나가야 할 일이 많을 거야. 하지만 둘이서 잘 풀어나갈 거라 생각하고 기도할게. 그리고 선물 이야기를 하자면 와이프가 살림을 맡아하면서 엄마가 주신 음식들도 본인 입맛에 안 맞으면 다음 날 바로 버려. 예전에는 내가 먹겠다고 며칠 놔둬봤지만 음식을 차리는 입장이 아니다 보니 그 음식이 잘 안 올라오게 되더라고. 그러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엄마 음식을 안 먹게 되더라고. 그래서 마음은 아프지만 엄마한테도 가져오지 말라고 하고 있어. 네가 준 약 선물도 마찬가지였어. 포스트잇으로 정성스럽게 사용법까지 알려준 것도 고맙고 울컥했지만 와이프 성향 상 그것도 쓰레기통으로 가더라고. 그래서 차라리 마음 아프지 않게 안 사 오는 게 낫겠다고 느껴져서 그렇게 얘기한 거야. 티나야! 두서없이 너에게 글을 썼지만 너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고 표현은 잘 못하지만 엄청 사랑한단다. 용돈도 더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와이프 눈치 보면서 그만큼밖에 못 넣은 거야. 그리고 혹시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나 하고 싶은 게 생각나면 혼자 고민하고 정성 들이고 하는 것도 좋지만 상대방의 의견도 같이 물어가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걸 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우리 티나.. 많이 섭섭하고 힘들고 막막하겠지만 지금까지 잘 버텨왔고 잘 헤쳐나가고 있어. 자주자주 연락하면서 지내자. 섭섭한 마음 이렇게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이 나누자. 아마 미국 가면 조카도 더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서로 더 많이 표현하자!
4. 그 후 결혼식과 장례식 사이 남매 사이
장문의 카톡을 나눈 이후에도 나와 오빠와의 사이는 사실 여전히 소원했다. 하지만 나는 늘 오빠내외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고 오빠에게 있는 나의 부채 의식과 엄마의 부채 의식도 얼른 사라지기를 희망했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게 된 나는 10년 전 오빠의 결혼식에 아빠가 오빠의 축의금을 나의 학비로 쓴 것에 대해 부채를 갚고 싶었고 남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결혼비용은 내가 전액 부담했는데 신부 몫의 축의금을 결혼식 비용으로 쓰는 대신 오빠에게 주기로 하자고 남편에게 제안했다. 다행히 남편은 흔쾌히 동의해 주었고 이제 아빠에게 동의를 받기만 하면 되었다. 비록 연금
120만 원으로 사는 아빠에게 축의금을 오빠에게 주자고 말하는 것은 죄송한 일이었지만 사실 처음부터 오빠 결혼식 때 오빠 하객으로부터 온 축의금을 내 등록금으로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오빠와 아빠의 거래를 내가 몰랐다면 더 좋았겠지만 오빠의 충분한 동의 없이 이뤄진 일이라 차마 눈감고 없던 일 취급할 수는 없었다.
아빠에게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오빠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의 빚에 대해 울분을 터뜨렸고 엄마가 오랫동안 오빠에게 느낀 부채 의식 또한 이번 축의금으로 떨쳐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오빠는 처가에서 많이 받고 있는 지원으로 와이프의 눈치를 보며 사는 좀 안쓰러운 남편이라 이번 기회에 본가에서 돈을 좀 주면 오빠의 기가 살 것 같다고 말했다. 고급 리조트를 자주 갈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처가에 더부살이 같은 신세가 되며 움츠러들었을 오빠의 자존심을 좀 높여주고 싶었다. 어릴 때의 오빠를 기억해 보면 자존심이 드높은 오빠가 그 기를 펴지 못하는 지금이 얼마나 외로울지 안쓰러웠다.
아빠도 동의하셔서 그렇게 결혼식 때 신부 측 축의금은 모두 오빠에게 주었다. 나는 하객도 많지 않고 아빠는 퇴직하신 지 시간이 지나셔서 10년 전에 오빠의 결혼식 때 내가 학비로 쓴 금액보다 좀 더 적었지만 나 스스로 있던 마음의 빚을 드디어 갚게 되었다. 아빠에게는 죄송한 마음이 컸지만 나의 마음을 10년 넘게 옥죄고 있던 오빠에 대한 빚을 갚아야만 내가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와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오빠의 기도 좀 살아나고 엄마는 부채 의식을 아들에게 덜 느꼈으면 했다.
결혼식을 올린 후 남편과 나는 1년에 한 번 꼭 친정 가족들과의 여행과 시댁 가족들과의 여행을 계획하자고 약속했다. 친정 가족들과의 여행은 사실 오빠네가 빠진 여행이었다. 나는 새언니가 불편할까 봐 오빠 내외에게 같이 여행 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먼저 해주기를 바랐었던 것 같다. 오빠가 처갓댁과 자주 가족 모임으로 고급리조트에 가는 것을 엄마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오빠는 엄마에게 하지 않아도 될 처갓집과의 여행들을 늘 공유했었다. 부자인 처형네 부부가 다 경비를 지불하고 오빠네는 몸만 따라가는 여행이라서 공짜 여행이 신이 나서 엄마에게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왜 우리 집은 그렇게 못하는 거냐며 아쉬움을 얘기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결혼한 내가 느끼기에 오빠는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엄마에게 많이 전했다. 나와 남편이 계획한 속초 여행에도, 베트남 여행에도, 제주도 여행에도 한 번쯤은 오빠네 가족이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남편네 가족들은 화목하고 단결이 잘 되어서 매년 함께 여행도 잘 가는데 왜 우리 집은 안 그러는지 사실 좀 섭섭했다. 시댁 가족들은 여행을 가면 거실에 모두 모여서 자기 전까지 수다를 떤다. 나도 그 사이에서 재밌게 얘기를 한다. 시댁이라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을 눈치보기는 하지만 화목한 분위기에 둘러싸이는 기분은 참 포근하다. 내가 어릴 때 느끼지 못한 그 꽉 찬 따스함은 황홀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나의 부모님은 사이가 안 좋으셔서 함께 식사를 해도 두 분 눈치를 보느라 조금 긴장이 되는데 시부모님은 사이가 좋으셔서 늘 같이 붙어 다니 신다. 티격태격하실 때도 있지만 서로 잘 챙기시기 때문에 남편과 형님이 부모님 걱정을 덜 하는 것도 부러웠다. 나는 가끔 시댁 가족들과 재밌는 하루를 보내고 잠이 들기 전에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따스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는 이 가족이 너무 좋아서… 그리고 그런 남편이 너무 부러워서… 마음이 복잡해지고는 하였다.
가족사진을 찍기로 한 그날도 나는 오빠에게 가족사진을 찍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오빠도 시간 내서 같이 찍으면 좋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사실 오빠가 먼저 말해주기를 바랐다. 장소도 알고 시간도 알고 있으니 알아서 오빠네 세 가족이 시간 내서 와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국 사진은 나와 남편, 부모님만이 함께 찍었다.
넷이 찍은 사진 속에 엄마와 아빠는 좀처럼 잘 볼 수 없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셨다. 부모님은 화목한 부부의 모습이다. 남편은 이 가족의 아들처럼 정말 행복한 표정이다. 그 사진 속 나도 웃고 있다. 사진 속에서나마 우리 가족은 참 화목해 보인다.
엄마 아빠의 독사진도 함께 찍었다. 사진 속 엄마는 인자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주름들을 포토샵으로 조금 수정하자 엄마는 10년은 젊어 보이신다. 사진 속 우리 엄마는 참 예쁘다. 위암 수술한 지 4년 차가 되어 가는 아빠는 더 살이 빠지셔서 겨울날 낙엽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 같다. 튼튼한 나무와 같았던 아빠의 머리에는 어느새 소복한 눈이 왔고 눈가와 입가는 쳐져서 지쳐 보인다. 하지만 아빠의 눈만은 초롱초롱 빛이 나며 편안한 미소를 짓고 계신다. 사진 속 우리 아빠는 여전히 나에게는 나무 같은 내가 사랑하는 아빠다.
그게 아빠와의 생전 마지막 추억이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가족사진을 찍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나와 남편은 갑작스러운 아빠의 부고 소식을 들었고 출국한 지 한 달 만에 다시 한국에 나왔다. 언젠가 아빠와 헤어지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 몰랐다. 오빠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때 가족사진을 같이 찍으러 갈 걸 하며 후회했다. 그때 오빠네 가족 셋이서 가족 여행을 취소하고 아빠와 가족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아쉽다고 내 앞에서 울었다. 나는 오빠의 그 모습을 보며 철없던 오빠의 그동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오빠에게 아빠의 마지막이 급격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더 단호하게 알려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불편해하는 새언니한테는 미안하지만 내가 매개체가 되어 가족의 모임을 더 적극적으로 설득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랬다면 덜 아쉬웠을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리해야 할 서류들과 유품들은 남은 유가족의 몫이었다. 남편에게 미운 정이 든 노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남편이 안쓰러워진다. 노모는 남편이 수많은 짐들을 홀로 짊어지며 얼마나 외로웠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사이 오빠와 나는 아빠의 유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지난 추억들을 되새겼다.
“오빠! 이거 기억나? 아빠가 계곡 가면 이 코펠에다가 라면 끓여주시고 찌개 끓여주시고 그랬잖아. 와 이것도 있다. 그 옛날 우리가 쓰던 손톱깎이, 아빠가 산에서 나뭇가지를 깎아서 만든 회초리... 오빠가 사준 아빠 신발! 내가 사준 아빠 운동화… ”
“와… 이게 아직도 있어? 흑… 아빠는 이런 거를 왜 안 버리고 갖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나와 오빠는 엉엉 울었다.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북받쳐 한 사람이 꺼이꺼이 울면 다른 한 사람은 토닥여주었다. 우리들의 눈물 속에 아빠의 73년 인생은 때가 묻은 유품들과 함께 정리되어갔다. 유품 정리는 꼬박 3일이 걸렸다. 아빠는 해진 물건도 고쳐서 쓰시는 분이셔서 평생 모은 물건들이 정말 많았다. 물건을 수거하는 업체를 불렀더니 폐기물이 100킬로나 나왔던지라 10만 원 가까이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아빠의 평생을 정리하며 우리 남매는 후회와 아쉬움이 사무쳤다. 아빠를 향한 그리움은 남은 엄마에게라도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불러일으켰다.
아빠의 죽음은 오빠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다. 부모님께 전화 하나 잘 안 하던 사람이 매일 아침 꼬박꼬박 전화를 하기 시작했고 새언니와 함께 조카를 데리고 엄마를 보러 자주 오기도 하고 나와 남편이 한국에 놀러 가면 다 같이 여행을 가려고 미리 계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동생이 사는 미국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오빠는 철이 들었는지 최근 엄마를 모시고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우리 집에 온 오빠는 우리 부부가 아빠와 찍은 가족사진을 보면서 또 이야기했다.
“아… 그때 나도 가족사진을 같이 찍을 걸…”
예전과는 다르게 미국 여행하는 동안 오빠는 다리가 불편한 엄마의 손을 자주 잡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우리들에게 나무였던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함을 깨달은 우리 남매… 이것이 아빠가 남긴 유산인가 싶다.
오빠는 저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얄미운 사람입니다. 혼자 힘으로 박사가 되고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 것이 대견하고 자랑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 잇속을 챙기며 부모님에게 이거 하지 말고 저거 하지 말라 하며 부모님의 마음은 잘 헤아리지 못하는 오빠가 참 얄미웠습니다. 오빠가 새언니의 남편이면서 부모님의 아들로 중간자 역할을 슬기롭게 잘 못한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대체 언제 철이 들까 정말 걱정스러웠어요. 자기 와이프가 무언가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을 그대로 본가에 전하는 남편은 남편으로서도 또 아들로서도 부족한 사람 아닌가요? 오빠는 그 말을 부모님에게 전하면서 본인의 마음은 편해졌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서 새언니는 조금씩 마녀 같은 캐릭터로 그려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빠의 중간자 역할은 빵점입니다.
오빠가 전하는 말들 때문에 새언니가 얄밉다고 생각한 적도 종종 있어요. 어느새 며느리가 된 저도 며느리가 시댁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게 되었지만 새언니처럼 칼같이 시댁과의 거리를 두지는 않거든요. 시어머님이 남편 먹으라고 주신 음식을 마음 아프게 버리지는 않거든요. 그럴 때마다 깊이 기도했습니다. 두 부부가 제발 행복하게 잘 살아달라고 말입니다. 제가 오빠를 얄밉게 생각하는 이 마음이 제발 누그러들고 오빠네 가족이 행복하고 화목하게 해 달라고요. 오빠가 부모님과 저에게 상처를 주어도 다 감당할 테니 오빠네 가족이 화목한 걸로 퉁치자고 말입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니 오빠네 내외가 엄마에게 하는 것들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엄마를 대하는 온도가 따뜻해졌다고 할까요? 오빠는 새언니와 딸은 집에 두고 가끔 혼자서 서울에 올라와 엄마와 시간을 보냅니다. 엄마와 오빠는 동네 맛집을 갑니다. 엄마는 오빠가 좋아했던 엄마의 알타리 김치를 식탁에 내놓고 오빠는 잘 먹습니다.
저는 오빠와 새언니를 얄밉게 생각하지 않으려 지금도 노력합니다. 잘 나가는 큰 언니의 출세로 자격지심이 있는 듯한 새언니와 오빠를 위해서 늘 기도합니다. 귀여운 저의 조카가 이 부부의 상처들은 물려받지 않고 사랑만 물려받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저의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