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과 미국 영주권 승인
1. 코로나 19 사태
2020년 3월 3일, 내가 사는 주의 한 요양시설에서 코로나19 대량감염사태가 터지며 코로나 19 비상사태가 발령되었다. 곧 250명 이상이 모이는 모임은 금지되었고 세계 보건기구, WHO에서는 코로나 19를 범유행, 즉 팬데믹으로 발표했다. 그로 인해 모든 학교들에서도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남편이 다니던 치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졸지에 모든 실습과 수업들이 취소되어 졸업 전 이수해야 하는 실습과목들을 이수할 수 없게 되었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남편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골로 와서 나의 출퇴근 운전을 담당해 주고 집안일을 했다. 코로나 19는 전 세계를 순식간에 멈춰버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보고 싶던 남편과 매일을 함께하는 꿈같은 일상을 만들어 주었다. 사실 코로나 19 덕분에 남편과 더 일찍 함께할 수 있었어서 행복했던 것 같다.
나는 이때 영주권 마지막 단계인 인터뷰를 앞두고 있었다. 혹시나 코로나 19로 인해 영주권 진행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하였지만 다행히 예정된 대로 영주권 인터뷰를 3월 13일에 할 수 있었다. 이때 얼마 전 결혼한 남편의 서류도 함께 제출하였다. 이민국에서는 사기 결혼이 아닌지 증명을 원하는데 물론 나와 남편은 여기저기서 함께 찍은 사진이 넘치고 넘쳤다. 여러 후기들을 찾아보면서 가끔 무서운 담당자들을 만나 인터뷰가 공포스러웠다는 사람들도 들었어서 매우 긴장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인터뷰를 한 담당자는 상냥한 여자분이었다. 어떻게 만났으며 얼마나 만났냐, 결혼식은 어디서 했고 누가 참석하였는지, 함께 돈 관리를 하는 통장이 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나는 생각보다 수월했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 단계이다!
남편과 함께하는 일상이 시작되자 일도 별로 힘들지 않았고 영주권이 곧 나오면 이 직장을 그만둘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했다. 작년에 이미 양가 부모님을 뵙고 상견례를 마쳤던 우리는 양가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미국에서 작은 결혼식을 계획했다. 코로나 때문에 어차피 많은 인원을 초대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 스몰 웨딩을 생각한 우리 부부에게 크게 나쁠 조건이 없었다. 2020년 초여름, 바다가 보이는 예쁜 레스토랑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예약하고 가족들의 비행기 티켓도 구매했다. 한국에서 오시는 결혼식 참석 인원은 양가 부모님과 형제들이 전부였다. 가족들이 있을 호텔도 예약하고 드레스와 턱시도를 고르며 작지만 행복한 결혼식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는 예상보다 더욱 심각해졌고 곧 하늘길도 막혀버렸다. 치대 졸업을 앞두고 있던 남편은 학교 병원에서 이수하지 못했던 실습을 마치기 위해 몇 주 동안 학교로 돌아갔고 무사히 졸업요건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어찌어찌 졸업은 하게 되었지만 끝끝내 졸업식은 열리지 않고야 말았다. 부모님이 내 약대 졸업식에 참석하셨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동적이었는지 아직도 생생한데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순간을 만끽하지 못하게 되어 너무 안타깝고 서운했다. 남편은 졸업 동기들과 작게 사진을 찍으며 졸업식 분위기를 내려했지만 가족들과 함께하는 졸업식과는 비교가 되겠는가?
나는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 약국에서 마스크를 쓰고 평소와 같이 여러 환자들을 대하며 근무했다. 내가 대하는 많은 환자들은 코로나 19 상황에서도 약국을 지키며 일하는 나를 고마워해주고 나와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었다. 미국 전역으로 약사를 비롯한 의료진, 소방관, 경찰관 등 First Responder 들에게 감사하는 피켓들이 거리 곳곳에 설치되었고 여러 카페에서는 커피를 공짜로 제공해주기도 했다. 나는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받고 일하는 건데 내가 하는 일을 이렇게 고마워해주며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이 조금 머쓱했지만 감사하기도 했다.
코로나의 공포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닐 때 일부 미국인들은 마스크 쓰기를 거부했다. 내가 있던 시골에는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느 때와 같이 혼자 일하는 어느 주말에 약국 앞에서 픽업을 기다리던 한 환자가 마스크를 안 쓰고 약국에 온 한 남자에게 마스크를 쓰지 않고 왜 약국에 오냐며 따졌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코로나가 번지는 거라며 크게 말싸움이 번졌고 나는 다른 환자들을 돕느라 약국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악화되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결국 다른 직원이 와서 만류를 하고 나서야 말싸움이 끝났다. 언제 이 사태가 나아지는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조금씩 전 세계 사람들은 무기력해져 갔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코로나 19 사태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결혼식 관련 예약을 모두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2. 그 사이 한국의 가족들
전 세계가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며 코로나 백신이 하루빨리 나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은 평소처럼 엄마와 전화를 하려고 보이스톡을 했는데 핸드폰 너머에서 뜬금없이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자분, 주무시지 마시고 숨 쉬셔야 됩니다. 후우 하고 숨 쉬세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엄마에게 물어보니 아빠가 방금 암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에 멀리 있는 딸은 어차피 오지도 못하고 걱정만 할 테니 엄마가 나에게 아무런 말씀을 해주시지 않은 것이다. 엄마의 말로는 아빠가 몇 주째 혈변이 나오고 배가 너무 아파서 참고 참다가 응급실에 가셨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온 진단명은 위암. 할아버지가 위암 3기로 돌아가신 지 10년 정도가 흘렀을 시점인데 암이 또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엄마 말씀으로는 수술한 의사가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며 술담배를 끊으시고 회복 잘하시면 정상 생활 하실 수 있으실 거라고 했다고 했다. 아빠는 잘 이겨낼 거니 걱정 말라는 엄마의 야속한 말과 함께. 나는 아빠를 얼른 보러 한국에 가고 싶었다. 내가 취직을 하고 부모님을 내가 번 돈으로 처음 모셨을 때 함께 곳곳을 여행하며 추억을 쌓았는데 그게 벌써 1년이 넘었다. 그때 내가 번 돈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귀국하실 때 달러로 용돈도 두둑이 챙겨드린 것이 얼마나 보람찬지 모른다. 지금쯤 부모님을 다시 뵐 시기인데 가족들과 나를 갈라놓은 이 역병이 너무나도 야속했다. 코로나 시국이 나아지기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날은 남편에게 기대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3. 초록 영주권 카드와 바꾼 나의 청춘
영주권 인터뷰를 한 후 시간은 어느덧 6개월이 흘렀다. 2020년 9월 25일 아침, 남편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내게 달려왔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놀란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남편이 보여주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는 몸이 굳어져버렸다. 바로 "영주권이 승인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열흘 정도 후에 영주권 카드를 실물로 받았다. 신용카드와 같은 크기의 작은 카드. ‘이게 영주권 카드구나!’ 하며 펑펑 울었다.
유학 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2006년 6월 29일 토론토에서의 시작, 2008년 미국 대학교에서의 학부 생활, 2010년 1년간의 한국 요양, 2011년 미국 약대 입학, 2016년 약대 졸업, 그리고 2016년 8월 첫 직장에서 2020년 9월까지... 나의 청춘이 이 작은 영주권 카드 하나에 응축되어 있었다. 요즘 15억을 내야 받을 수 있다는 영주권을 나는 나의 몸을 채찍질하면서 드디어 받아낸 것이다. 이제 이 영주권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롭게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행복하게 살 날이 곧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며 만세가 절로 나왔다! 아니,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코로나 팬데믹은 많은 사람에게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특히 저의 경우에는 영주권 진행으로 몇 년 동안 고국을 방문하지 못한 데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시기에 갑자기 알게 된 저희 아빠의 위암 수술로 코로나만 생각하면 아빠가 돌아가실까 봐 두려웠던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암 수술과 코로나 상황은 제가 미국에서 정착하기 위해 우선순위로 선택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한국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 지 14년 만에 저는 미국 영주권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14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죠. 캐나다에서 미국 대학교로 갈 때 저의 학생 비자가 거절되었잖아요. 엄마가 신청하신 취업 영주권이 승인되기를 기다렸다면 분명 좀 더 빨리 받았겠지요? 하지만 제가 겪은 고생을 엄마가 겪으셨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것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다 적절한 때에 모든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믿어봅니다. 초록색 영주권 카드는 오랜 시간 이방인으로 미국에 살았던 저에게 신분의 안정을 주었어요. 하지만 앞으로의 미국 생활에 과연 꽃길만 펼쳐졌을까요? 저는 무엇을 위해 미국에 정착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 이야기를 다음 주에 풀어보고자 해요. 이번 주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