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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와 묘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by 전진식

10,29,

만주기행ㅡ[8탄]


윤동주 생가와 조선족의 유래


9시 30분 석화원장님 일행이 승용차 2대로 호텔로 왔다

오늘 일정이 용정의 조선족 시발점인 "용정" 샘터를 시작으로 윤동주 시인의 묘지와 생가를 들려 식사 후 김한수 박사님의 사무실로 가서 조선족의 유래를 탐 하자고 한다

차는 출발하여 연길시를 벗어난다 연길 외가각지 풍경을 살피는데 야산 아래 큼직한 과수원을 가르치며 사과배 과수원이라며 사과와 배를 접목하여 만든 과일인데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생산 된다고 한다 왜? 우리나라는 없을까 했더니 기후조건이 맞지 않아서 그런가 했다 저녁에 식당에 가서 맛을 보자고 한다

30분 쯤 지나서 용정 시가지를 들어선다

용정시

여기가 조선족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이 곳에는 인구의 70%가 조선족이라며 그 시발점의 마을로 가잔다 차를 주차한 곳에 우물이 있고 돌비석이 있다 우물 앞에서 사진 한 컷을 하고 일제의 형무소라는 곳을 둘러보고 윤동주 시인의 묘소로 간다

나즈막한 야산길로 들어서니 양때들이 차 앞을 행단 한다 작대기를 든 양치기 사내의 초라한 모습이 보였고 양때 뒤로 양때를 보살피며 길을 인도하는 개 두 마리도 보였다

양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도착한 곳이 공동묘지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옛 공동묘지의 모양새다 기독교인 묘소라는데 차를 새우고 20m아래로 내려가니 묘소 주변에 울타리가 있고 윤동주 시인의 묘지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윤동주 시인의 묘지

시인은 여기에 잠들었는데 후쿠오카 감옥에서 여기까지 시신을 어떻게 운구했을까? 가묘라는 설도 있다는데 그 옆에 시인의 이사촌 송몽규 독립운동가의 묘지도 나란히 함께 있었다

묘지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였다

애국지사로 일본 형사에게 붙잡혀서 후쿠오카 감옥에서의 혹된 생활 속에 시인의 젊음을 그려 본다 해방을1년도 남기지 않았는데 인체실험의 제물로 세상을 결별하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윤동주 시인은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도 아니었고,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인은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에 불과하고, 공부나 시도 생활이 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시 정신은 어느 투사 못지 않게 치열한 바가 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서시>의 구절처럼, 그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다가

송몽규님의 묘소 앞에서도 잠시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윤동주시인의 생가로 간단다

한적한 마을 입구에서 부터 눈을 감았다 옛 시골집의 형상을 그리고 있었는데

집 앞 출입구부터 돌에 새긴 생가의 화려한 표지판

님의 생가가 이렇게 화려함은 왜인가?


고개를 흔들며 집안을 들어서는데

입구에서는 출입로를 받는다 이도 6,000원이란다

생가 마당에 들어서니 우측에 그 당시의 교회가 있었고 좌측에는 전시관 있다 생가는 멀리로 보였다

생가로 가는 마당 양쪽에는 시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큼직한 시비에 새겨진 "서시" 옆에서 한 컷을 하고 뜨락에 섰다

내가 생각한 님의 "생가"는 초라한 초가에 허물어 질듯한 집이였다

그런데 大家였다

허긴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부터 부농이라서 일본까지 유학을 간 것이 아닌가

박작가가 투들거린다

10년전 여기에 왔을 때는 생가는 이런 모습이 아니였다고,

집을 보수 한 것이 세멘트로 떡칠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내가 보아도 이 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관을 들렸는데 학창시절의 모습들이 사진으로 전시 되어 있었다

옆에 있는 송명규님의 생가를 들렸는데 이 건 그래도 그 시절의 느낌이 조금 와닿았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래는 전시관에서

아래는 송몽규님의 생가

견학을 끝내고 마을을 빠져 나와서 농촌길을 달리는 차가 멈춘 곳은 어느 농가였다

친구집인데 우리를 위하여 식사를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니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는 노부부에게서 촌락의 아늑함이 느껴진다 처음 보는데도 인정이 넘친다

집안 내부를 둘러보니 여기도 북방의 온돌구들과 가마솥이 방안에 있다

벌써 상차림을 해놓았는데 텃밭에서 가꾼 채소를 반찬을 만들었다며 최고의 손님을 위한 만찬을 준비했단다

중국에서는 1등으로 귀한 손님을 집으로 초대한다는데 우리들 보고 엄지 손까락을 척 올려 보인다

푸짐한 상차림에 술도 풍성했고 술을 권하는 손길들이 바쁘다

조심조심 주량을 헤아리면 잔을 받았다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만주에 있는 연변 주변의 소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만강 이야기가 나왔고 내일 일정을 두만강으로 바꾸면 어떠냐고 한다

원래는 목단강을 가기로 했고 목단강의 이동열 선생님의 문학단체에서 환영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박작가가 나중에 이동열 선생님과 통화하고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중국에서 한국어 말살 정책을 펴고 있는 것으로 전번 조선족한국학교 교장선생님의 말에 대학시험에 조선어 배점이 없어진다는 얘기를 했더니 여기 연길의 상가 간판 얘기를 한다

작년까지는 상가 간판에 한국에가 먼저 있고 한문이 뒤에 있었는데

지난 4월 연길과 용정등 중국내에 있는 모든 상가 간판은 한문을 앞서 기록하고 뒤에 한글을 넣어 달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글이 앞에 있는 간판)

(한글이 아래에 있는 간판)

마을을 나와 차가 달린다 연길 김한수 박사의 사무실이란다

김한수 박사?

그는 한양대학을 나와서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이곳 연변에 와서 관광객을 상대로 조선족 알리기 즉 조선족이 얼마나 한국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알리고 조선족들과 함께 한글 알리기 행사를 주관해 오고 있는 분이다

조선족의 유래는 1905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용정에 자리를 잡고 이 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용정에서는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고 하면서

피와 땀’으로 일본군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용정’을 꼽는다

만주 항일투쟁을 기리는 ‘3·13 반일의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났고

‘무장투쟁’의 신호탄 만주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도 이곳에 있단다

"용정"은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란다

조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오로지 대한독립을 위해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3년 전에 상영된 영화 "밀정"의 본거지도 여기란다

일제의 민족말살주의 정책에 맞서 교육을 시작으로 역사, 문화, 언어 등을 전파하며

후손들에게 뿌리를 일깨우기 위해 이곳에서 힘썼던 항일독립운동가들.

피와 땀’으로 일군 독립정신은

여기 조선족으로 하여 여전히 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6,25전쟁때는 이곳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중공군과 합류하여 백두산으로 진격하였다는데 그 분들의 대부분이 일제 당시에 일본군과 맞서서 싸운 독립의용군이었단다


한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 뿌리를 지키려는 조선족

지금 만나고 있는 분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둘러본다

속으로 힘찬 박수를 올린다


강의가 끝나고 석하 원장님의 문하생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갔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7시 쯤 되었는데

가게 문을 닫고

여기 식당의 주 음식이 아닌 다른 음식으로 준비했다며 자리를 권한다

조선족 단체들의 또하나 합심 된 마음을 본다

***

다음회는 두만강과 웅녀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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