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왜 마음의 경보는 아직 꺼지지 않는가?
1. 완수한 손이 아직 떨리는 이유
알베르 카뮈는 1942년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를 새롭게 읽어 낸다. 신들에게 저주받아 영원히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인간. 바위는 정상에 닿는 순간 다시 굴러 내려간다. 카뮈가 멈춰 선 것은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시지프가 산을 내려오는 그 짧은 걸음이었다. 일을 끝낸 직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딛는 발걸음.
오늘 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노트북을 덮는다. 마지막 메일을 발송했다. 최종 발표를 마쳤다. 서명이 끝난 계약서를 파일함에 넣는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나도 눈이 감기지 않는다. 생각은 그 메일로, 그 발표 장면으로, 그 계약의 조항으로 다시 돌아온다.
완수 직후 산을 내려오는 시지프의 걸음이, 오늘 밤 이 사람에게서 다시 보인다. 완수는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불안은 무엇이 남아서 작동하는 것인가.
불안을 오해하는 방식이 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불안하다"는 해석이다. 이 판단이 나오면 우리는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더 준비하고, 더 확인하고, 더 계산한다. 그러나 불안이 출발하는 뇌의 지점은 해결이 아니라 감지다.
뇌의 편도체(amygdala)는 위협 감지 전담 구조물이다.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Joseph LeDoux)가 1990년대 일련의 연구에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편도체는 위협 자극에 대해 두 경로로 반응한다. 빠른 경로는 시상(thalamus)을 거쳐 편도체로 직접 이어지며, 의식이 개입하기 전에 신체 경보를 발동한다. 느린 경로는 피질(cortex)을 거쳐 맥락을 판단한 뒤 편도체에 도달한다. 이 이중 경로 구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먼저 긴장하는 경험이 생긴다.
편도체의 경보가 꺼지는 조건은 하나다. 위협이 사라졌다는 명확한 신호다. 포식자가 물러가면 경보는 끝난다. 그러나 현대의 위협은 다른 형태를 갖는다. "상대가 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이런 위협은 불확실성 그 자체가 내용이다. 불확실성은 노력으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모두 마쳐도, 결과는 외부의 영역에 남아 있다. 상대방의 반응, 시장의 방향, 조직의 결정. 편도체는 이 상태를 위협이 계속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는다.
편도체가 처리하도록 설계된 위협과 현대인이 마주하는 위협 사이에는 구조적 불일치가 있다. 신체적 위험은 공간과 시간에 경계가 있다. 그러나 평가를 기다리는 불안, 관계의 불확실성, 결과를 기다리는 긴장은 경계가 없다. 편도체는 두 종류의 위협을 구별하지 않는다. 경보를 울리는 방식은 동일하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문장은 행동의 완결을 선언하지만, 편도체의 경보를 끄는 코드가 아니다. 시스템은 아직 켜져 있다. 그 사실이 다음 질문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여기서부터 이 불안의 본론이 나타난다.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순간, 공은 넘어갔다. 상대방에게, 시장에게, 시간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 순간에서 역으로 읽을 수 있다. 결과 그 자체가 아니다. 결과를 포함한 상황 전체를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지각된 통제감(perceived control)이라 부른다. 줄리언 로터(Julian Rotter)는 1966년 통제 소재(locus of control) 개념을 통해, 인간이 결과를 자신의 행동에서 찾는가 외부 환경에서 찾는가에 따라 심리적 안녕감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내가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불안을 줄이는 기제로 작동한다. 반대로 그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불안은 진입한다.
행동의 완결은 통제감의 회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가 작동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소진되면, 이제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없다는 뜻이다. 준비가 끝났다는 것은 동시에 개입할 여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편도체의 관점에서 이 상태는 비상 신호다. 더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안심이 아니라 위기로 읽힌다.
이 역설이 많은 것을 설명한다. 발표를 마친 뒤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경험, 계약 체결 당일 밤 잠을 못 자는 경험, 오래 기다린 결과를 앞두고 예민해지는 경험. 모두 같은 회로에서 나온다. 행동이 끝난 순간, 남은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뿐이고, 뇌는 그 공백을 비상으로 인식한다.
불안이 심해지면 사고의 기능 자체가 변한다. 생각은 분석에서 반복으로 이동한다. 분석은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반복은 같은 회로를 되밟는다. 이미 내린 결론을 다시 계산하고, 이미 확인한 사실을 또 확인한다. 실제 확률이 낮아도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머리를 지배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신체가 먼저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의지력의 문제가 아닌 이유가 있다. 오히려 유능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 오래 준비해 온 사람일수록 이 현상에 더 자주 노출된다. 미리 대비하는 습관이 뇌에 회로로 새겨진 사람은, 대비할 것이 없어진 상황을 가장 낯설어한다. 준비가 몸에 밴 사람에게 "이제 기다리면 된다"는 말은 안심이 아니라 또 다른 긴장이다.
가장 열심히 한 사람이 가장 오래 불안한 것은 실패의 징후가 아니다. 책임감이 강한 시스템이 종료 신호를 받지 못한 채 계속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인식이 다음 층위로 문을 연다.
불안이 깊은 사람의 내면에는 공통된 언어가 있다. "혹시라도." 이 두 글자가 모든 것의 시작이다. 혹시라도 내가 놓친 것이 있으면. 혹시라도 상대가 다르게 받아들이면. 혹시라도 결과가 기대와 어긋나면. 이 문장들은 논리로 반박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통제권을 잃었다는 감각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다. 인간이 가장 원시적인 층위에서 두려워하는 상태,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힘에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두 방향 중 하나로 움직인다. 더 행동하거나, 생각 안에서라도 통제를 되찾으려 하거나.
더 행동하는 방향은 이미 막혔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그래서 마음은 생각으로 통제를 시도한다. 같은 장면을 다시 재생하면 내가 놓친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다. 그러나 그 재생은 해답이 아니라 불안만 연장한다. 합리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려움에서 나온 결정의 구조다. 생각을 멈추는 것이 두려워서 계속 생각하는 것. 브레이크가 낯설어서 계속 달리는 상태.
이 상태는 자기 불신 위에 유지된다. "내가 정말 다 했을까." 이 의심이 종결 선언을 막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의심 자체가 그 사람이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증명한다. 가볍게 한 사람은 이 의심을 갖지 않는다. 불안의 강도는 종종 그 사람이 짊어진 것의 무게에 비례한다.
이 사실이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불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오해가 있다. 불안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더 행동해서 소진하거나, 논리로 제압하는 방향. 이 세 접근은 공통된 전제를 갖는다. "불안이 먼저 끝나야 다음으로 갈 수 있다." 그 순서가 거꾸로다.
불안을 다루는 더 효과적인 방법은 감정의 종결이 아니라 운영의 종결을 먼저 선언하는 것이다. 불안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사안에 대한 운영을 닫겠다고 먼저 선언하는 것. "이 사안은 오늘부로 내 범위에서 종료한다." "불확실성은 남지만 내 책임 범위는 여기까지다." 이런 문장들은 감정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이 상황의 운전자임을 선언하는 행위다.
불안을 설득하려는 시도도 멈출 필요가 있다. 편도체는 논리로 달래지지 않는다. "이것은 준비 부족의 신호가 아니라 잔열이다." "내 위험 감지 시스템이 과하게 켜진 상태다." 불안을 인격의 결함에서 분리하는 순간, 강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해서 몸이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먼저 안정시키면 생각이 정리된다는 것도 기억할 만하다. 이것은 의지가 아니라 생리학이다.
불안은 때로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회복을 요청하는 신호다. 해법은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멈추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다.
그 허락을 내리는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지, 결론이 말한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문장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다. 그 말이 나온 자리에는 준비, 결단, 책임, 그리고 많은 소모가 쌓여 있다. 그런데도 불안이 남는다면, 그것은 부족해서가 아니라 강하게 오래 돌아간 시스템이 종료 신호를 받지 못한 상태다.
결국 이 문제는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허락의 문제다. 이미 한 것을 충분하다고 인정하는 선언. 불안이 끝나야 쉴 수 있다는 순서가 아니라, 불안이 남아 있어도 회복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 문장으로 이렇게 썼다.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완수한 뒤 산을 내려오는 그 걸음을 카뮈는 체념이 아니라 수용으로 읽었다. 다시 올라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걸음을 걷는 것. 그것이 이미 하나의 응답이다.
당신은 지금, 불안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도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는가.
※참고문헌
카뮈, A. (1942). Le Mythe de Sisyphe. Paris: Gallimard. (김화영 역. 2016. 『시지프 신화』. 서울: 민음사.)
LeDoux, J. E. (1996). The Emotional Brain. New York: Simon & Schuster.
Rotter, J. B. (1966). Generalized expectancies for internal versus external control of reinforcement. Psychological Monographs, 80(1), 1-28.
Seligman, M. E. P. (1975). Helplessness: On Depression, Development, and Death. San Francisco: W. H. Freeman.
Langer, E. J. (1975). The illusion of control.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32(2), 31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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