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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로 그려낸] 이봉창의 삶

나는 조선인이었지만, 조선인답지 못했고, 마침내 조선인이 되었다.

by 담담이

이 이야기는 이봉창 의사의 생애를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구성한 독백과 대화 형식의 스토리입니다. 주요 발언들은 가능한 한 원문 그대로 반영하였으며, 그의 삶의 궤적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최소한의 해석만을 더함으로써, 이봉창 의사의 내면과 사건의 전개를 충실히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1. 조선에서의 삶

나는 조선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하지만 13세 무렵, 여느 조선인의 삶과 다름없이 조선에 뿌리를 내린 악덕 일본인들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집안의 불운이 겹쳐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내 청소년기는 "고용살이"의 연속이었다. 일본인 밑에서 일하며 탁월한 학습 능력을 보였으나 합당한 대우나 인간적인 존중을 받지 못했다. 그 시기, 나는 조선인이 조선의 땅에서 점점 입지를 잃어가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때 나의 가치 없는 생활을 깨달았으며 이 세상이 얄궂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상대는 일본인이다. 나는 내가 조선인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혹 억울하게 내던져지고 채인다 하더라도 말없이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다. 체념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 차별이나 학대를 받지 않고 살아갔을 것이다. 불행하게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2. 신일본인의 길

나는 더 이상 조선 땅에 설 곳이 없음을 느꼈고, 어머니를 설득해 조카 여동생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나는 일본에 오면 일본인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깨달았다. 결코 조선인은 일본인과 같이 대해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를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식민지현실을 인정하고 신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알았다.


나는 불행한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李太王 전하의 안을 뵌 적이 없으며 일한 합병 후 신일본인이 되어 천황폐하의 옥안을 뵌 적도 없다. 또 조선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역사의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다. 실로 부끄러운 인간이며 가치 없는 인간이다. 한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국왕의 옥안도 뵌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3. 교토에서의 체포, 그리고 각성

나는 그래서 어떻게든 일왕을 직접 보기로 마음먹었다. 같이 하숙하던 일본인 한 명과 조선인 한 명, 그렇게 셋이서 일왕을 보기 위해 교토로 향했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은 불안정했고, 3.1 운동 이후로 고조된 반일 정서 속에서 독립운동이 격화되자 일본 내부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검문이 한층 강화된 상태였다.


그날 내 품속에는 고향 친구가 보낸 편지 한 통이 있었다. 한문과 한글이 섞인 “착실히 일해 빨리 출세하라”는 내용의 평범한 안부 편지였다. 누가 봐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 경관은 그런 나를 끝내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일왕의 즉위례에 참석할 수 없도록 억류했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오직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11일 동안 유치장에 내팽개쳐진 채 방치되었다. 일왕을 보기 위해서 끝없이 무고함을 주장했던 나를.


나는 그때 무언가를 깨달았고 다짐했다. “우리 조선인은 조국 조선의 자유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며 나 자신 하나의 신명을 바쳐서라도 2천만 동포를 위해 조선 독립의 실현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나는 더 이상 이 땅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삶의 목적이 일본인으로 인정받는 것이었을 때조차, 나는 그 인정을 끝내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조선인으로 살아야 했다. 내 이름을 걸고, 내 정체를 되찾기 위해.


오사카에서 박태산이라는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내게 말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있다고. 거기 가면, 진짜 조선의 독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그 길로 상하이로 향했다.



4. 김구와의 첫 만남

그곳에서 나는 김구 선생을 만났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찾아간 나는 유창한 일본어를 썼고, 그들은 나를 준일본인쯤으로 보았다. 의심은 당연했다. 임시정부의 인사들 모두가 나를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했고, 사람들의 눈초리는 날카로웠다. 그들의 경계는 나를 향한 불신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내 안에 이미 굳은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선생은 시간을 두고 나를 조사하고자 했고 나에게 일본 내부 사정과 조선인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물었다.


김구: 일왕의 경비는 엄중한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봉창: 경계는 엄중하지만 하려고 작정하면 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김구: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가해볼 생각은 없는가.
이봉창: 나 자신이 내지에서 일본인으로 변신하여 살고 있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 상해로 찾아왔습니다. 폭탄이든 무엇이든 적당한 무기가 손에 들어오면 내지로 건너가 사건을 일으켜도 좋습니다.
김구: 일본 천황에게 위해를 가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촉진하려고 생각하여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적당한 인물을 물색했으나 찾지 못했네. 혹시 그대가 그처럼 굳은 결심을 갖고 있다면 조선민족을 위해 독립의 희생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네.
이봉창: 내가 일본에 상당히 오랫동안 살았고 또 도쿄 지리를 알고 있으므로 폭탄만 손에 들어오면 천황이 지나갈 때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것은 손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일왕을 죽인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총리대신이나 기타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고관을 죽이는 편이 훨씬 효과가 있을 겁니다.
김구: 그렇지 않네. 천황을 죽이는 편이 훨씬 효과가 있으며, 또 세계 각국에도 강한 영향을 줄 걸세.


이 대화를 기점으로, 나의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김구 선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로부터 나는 신뢰를 얻었다.



5. 김구와의 다섯 번째 만남

이봉창: 선생님, 폭탄을 구할 수 있습니까? 이제는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김구: 구할 수 있네. 여비 또한 준비할 수 있지. 자네의 결심만 굳건하다면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네.
이봉창: 제 나이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또 다른 31년을 살아간다 해도, 지금까지 겪은 방랑의 반생에 비하면 늙어가는 삶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그 쾌락이라는 것, 저는 이미 충분히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이 상해 땅에 왔습니다. 그 영원한 쾌락이란, 바로 조선 독립을 위한 헌신입니다.


이 말을 들은 김구 선생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기록에 이렇게 남겼다.


나는 이 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 오름을 금할 길이 없었다.



6. 최후의 이별

모든 준비가 끝났다. 김구 선생은 나를 이끌고 중국인 사진관으로 향했다.

김구: 이제는 최후의 이별이 될지도 모르네. 함께 사진을 남기세.


선생님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봉창: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그리고 나는 따로 폭탄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선서문을 가슴에 걸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敵國의 수괴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 앞 선서인 이봉창



7. 동경 의거

그날은 1932년 1월 8일, 나는 모든 것을 단념한 채 거사를 단행하러 나섰다. 일왕의 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는 겹겹이 쌓여 있었고, 나는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세 대의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두 번째 마차가 일왕의 마차라고 판단했다. 폭탄을 꺼내 들고, 그 마차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던졌다.


폭음이 터졌다. 공기는 찢어졌고, 순간 주변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곧 나는 직감했다. 실패였다는 것을. 일왕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고, 두 번째 마차에는 궁내대신 이치키 키토쿠로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왼쪽 주머니에 남겨두었던 두 번째 폭탄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던지는 것을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했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얼마 후, 제복을 입은 순사가 한 남성을 붙잡아 끌고 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아니다. 내가 했다. 내가 범인이다.


그리고 체포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숨지 않을 것이니, 난폭하게 굴지 마시오.”


그렇게 나는 순사와 헌병에게 스스로 붙잡혀 갔다.



8. 재판과 사형

그 후 나는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일왕, 즉 일본 국민 전체의 ‘어버이’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이유로, 내 죄는 가장 무거운 대역죄로 다루어졌다. 신문 과정은 비공개로 이루어졌으나 후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모순적인 내용이 많다. 일본 당국은 나의 발언을 조작해, 회한과 반성의 말처럼 꾸며냈다. 그 내용은 비공개로 이루어진 심문 속에서 날조되었으며, 내가 입 밖에 낸 적조차 없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내 조국,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그 어떤 순간에도 그 결심을 부정한 적이 없다. 부디 후세의 동포들은 이 진실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1933년 10월, 나는 예정된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형이 집행되었다.




나는 조선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차별을 견디며 살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조선인으로 죽었다. 내 인생의 후반부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하나의 도화선이 되기를 바랐고, 나의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 되기를 바랐다. 그대들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 나는 실패한 암살자가 아니라, 조국의 자유를 위해 불꽃이 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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