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의 문제도 아닌데, 왜 시간을 가져야 해?

by 우리

그날 저녁, 그는 평소처럼 퇴근길에 전화를 걸어왔다.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시작된 통화였지만,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나 요즘 정말 너무 힘들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이 메었다.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계속 자책하게 되고, 요즘은… 계속 가면을 쓰고 사는 느낌이야." 한동안 조용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힘들게 해? 근데… 이미 벌어진 일이고, 되돌릴 수는 없잖아. 그럼 그냥 잘해봐야지 뭐…" 숨이 막혀왔다. 그 말이, 그 말투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걸 내가 몰라서 말하는 거야?" 나는 억눌러왔던 감정을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그냥 너무 힘드니까, 참고 참다가 너한테 털어놓는 건데… 요즘 네가 바쁜 거 알아. 거기에 내 힘듦을 보태고 싶지도 않고, 짐 되는 거 싫어서 계속 참다가 끝내 터져서 말하는 건데 꼭 그렇게 남 얘기하듯 쉽게 말해야 돼? 나도 알아. 이건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거. 근데… 내가 매번 말했잖아. 너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하는 말들이 아니라고." 그러자 그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렇지. 결국은 네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 말은 칼날 같았다. 맞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그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억울했고, 동시에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나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끝내 그에게 말했다. “우리… 당분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그는 아주 잠시 멈췄다가 차분히 말했다. “왜? 우리 사이의 문제도 아닌데, 우리가 시간을 가져야 해?”... "지금은 상황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서로 너무 힘들잖아." 그는 짧게 말했다. “그래. 알겠어. 끊을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를 붙잡아주지 않은 그가, 내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은 그가 너무 미웠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는 현실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아픔에 뜬구름 잡는 위로를 던지는 대신, 어쩌면 나에게 진짜 필요한 건 냉정한 조언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그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누군가 단단히 잡아주길 바랐던 걸까. 누군가 대신 선택해 주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들어주기만 하길 바랐던 걸까.


그를 원망했었다. 붙잡아주지 않았다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왜 나보다 현실을 먼저 봤냐고.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상처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그가 받은 상처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는 걸.

그날, 나는 도와달라는 말속에 사실상 책임과 짐을 함께 떠넘기고 있었다. 그도 분명 지쳐 있었을 것이다. 늘 내 감정을 감당해야 했고, 내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나보다 먼저 무너질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까지 내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길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그게 가장 단단한 방식의 사랑이란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랑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그렇게 나를 또다시 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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