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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왜 피로한가

민주주의의 가장 지친 언어

by Simon park

정의라는 단어는 점점 입에 올리기 민망해졌다.

그 말이 쓰일수록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고,

누군가는 조롱하고,

누군가는 아예 말하지 않는다.

정의는 고귀해서가 아니라

지치도록 흔들렸기 때문에 피로한 단어가 되었다.


정의는 원래 불편한 단어다.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고,

무언가의 균형을 바꾸며,

기득권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언어다.


하지만 지금 정의는

그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정의를 말하면 선 넘는 진보,

침묵하면 기회주의자,

조정하면 위선자,

실행하면 독선가가 된다.


어느 쪽이든 정의는

지켜지기 전에 먼저 소모된다.


한국 정치의 언어는

정의 앞에서 항상 피로하다.

조국 사태 이후의 정의는 진영논리로 분열되었고,

이태원 참사 이후의 책임은 구조적 오류로 미뤄졌으며,

청년들의 분노는 “정의로운 분노”라는 말 대신

“분풀이”로 정리되었다.


정의는 사회의 상수여야 하는데,

지금은 상황의 변수로 소비된다.

필요할 땐 내세우고,

불리하면 숨기고,

불편하면 외면하는 방식.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정의로운 자가 아니라,

정의에 지친 자들만이 남았다.


헌법 제1조 2항은 말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제 권력은 보이지 않고,

주권은 피곤하다.


국민은 더 이상 사회를 바꾸기 위해 모이지 않는다.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체념한 시민은

정의보다 생존을 택한다.


2024년 기준,

서울시 청년층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고,

중산층 체감 비율은 40% 미만,

청년층 70% 이상은 “정치에 기대가 없다”고 응답했다.


이것은 정당의 실패가 아니라

정의라는 단어가 더 이상 감정을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신호다.

정의는 말의 문제이자 감정의 문제다.

감정을 수용하지 못한 정의는

정치가 아니라 규범이 되고,

규범은 감정이 배제된 순간

통제의 수단으로 바뀐다.


진짜 피로는 ‘정의가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의가 너무 드물기 때문에,

혹은 그 정의가 진심을 닮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로하다.


다들 정의를 외치지만,

그 정의는 누구도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지친다.


정의는 피곤하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정의가 소진되면,

그 자리는 복수의 언어가 대신한다.


정의가 제자리를 잃은 공간엔

조롱과 혐오, 음모론과 불신이 자란다.

그 안에서 분노는 날이 서고,

정치는 진실보다 진영을 택하며,

시민은 어느 순간

‘무언가를 바꾸려는 감정 자체’를 잃는다.


민주주의는 말의 제도이고,

정의는 그 말의 윤리다.

말이 반복되려면

그 말이 아직도 희망의 증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정의는 시스템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다.

그 기술이 사라지면,

정의는 더 이상 법이나 언어가 아니라

권력과 분열의 장치로만 작동한다.


무너진 정의는

혁명을 부른다.

하지만 지친 정의는

아무것도 부르지 않는다.

그저, 침묵 속에 공존하는 위기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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