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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왜 ‘윤리’를 팔기 시작했을까?

by Simon park

한때 기업은 제품을 팔았다.

그다음은 서비스.

그러고 나서 ‘경험’을 팔았고,

지금은 ‘윤리’를 팔고 있다.


“우리 회사는 환경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양성과 포용성을 존중합니다.”

“윤리적 경영을 통해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합니다.”


마치 모든 기업이 철학과 도덕의 심오한 고민 끝에 지구와 인류를 걱정하게 된 듯한 포장을 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영리해졌을 뿐이다.


윤리라는 상품


윤리는 원래 돈이 안 되는 것이었다.

옳은 일을 한다는 건 대체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윤리는 기업의 사명서에는 있지만, 손익계산서에는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윤리가 ‘팔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어디서 샀느냐’보다 ‘누구에게서 샀느냐’를 보기 시작했고,

그 누구가 얼마나 착한 척을 하느냐가 소비자의 선택을 좌우하게 되었다.


ESG.

요즘 기업들의 만능 키워드다.

환경을 위한 포장지, 젠더를 고려한 광고, 거버넌스를 강조한 리포트.

그 모든 것이 ‘좋은 기업’이라는 인상을 남기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다.


그럴듯한 프레임이지만, 따지고 보면 공허하다.

기업의 본질은 여전히 이윤이다.

그 윤리를 지키는 데 얼마가 들며, 얼마를 벌 수 있는지가 여전히 핵심이다.

즉, 윤리도 ROI가 계산되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착한 척하는 자본주의


문제는 이것이 선함의 왜곡이라는 것이다.

윤리를 자본주의에 편입시키는 순간, 윤리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오직 팔기 위한 이야기로 전락한다.


기후 위기를 걱정한다며 플라스틱을 줄이겠다는 브랜드가

정작 매년 수백만 개의 일회용 샘플을 뿌린다.

젠더를 존중한다는 기업이

내부 성폭력 문제에선 침묵한다.

가난한 나라의 아동을 돕겠다며 캠페인을 벌이는 기업이

그 나라 공장에서 최저임금도 안 주고 물건을 만든다.


‘윤리’를 말하는 그 입술이

가장 비윤리적인 침묵과 거래를 동시에 행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포장된 윤리’에 안도하며 소비한다.

마치 착한 기업에서 사면 내가 착해지는 것처럼.

이중의 환상이 공존하는 시장.

기업은 그 환상을 팔고, 소비자는 그 환상을 사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선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윤리를 ‘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키는’ 기업이 생겨야 한다.

그 기업은 느리고, 손해를 보며, 비효율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진짜 윤리다.


우리는 ‘윤리를 무기삼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윤리 앞에 겸손한 자본주의’를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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