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중산층은 점점 줄어드는가

계층이동이 멈춘 사회에서 희망은 어디로 가는가

by Simon park

통계청은 말한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의 중산층 비율은 56.6%.

그러나 이 수치는 ‘느낌’을 반영하지 않는다.


중산층이라고 답한 사람도

정작 “나는 계층 상승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고,

중산층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이미 추월당한 기차”처럼 그 단어 자체를 부정한다.


중산층은 수치상 존재하지만,

감정상 사라진 계층이 되었다.


중산층은 단순한 ‘소득 구간’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

즉 “내가 노력하면 내 아이는 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계층 이동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한국 사회는 상향이동 사다리를 끊고,

그 자리에 고립된 플랫폼 계층을 세웠다.


공장은 해외로 떠났고,

서비스업은 파편화되었으며,

전통적 중산층 직업인 공무원·교사·은행원조차

이젠 상류층이 아닌 안전망 계층으로 간주된다.


30대는 취업을 해도 집을 살 수 없다.

40대는 대출을 갚으며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

50대는 부모의 부양과 자녀의 학자금 사이에 끼인다.

그리고 20대는 처음부터 계층을 의심한다.


그래서 ‘중산층’은

상승 중인 계층이 아니라, 하강 중인 계층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자산 격차는 계층 구조를 변형시켰고,

이제 중산층은 자산으로 구분되고,

하층은 노동으로 정의된다.

노동으로 자산을 역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소득 불평등이 아니라 구조 불가능성에 가까워진다.


2000년대 초만 해도

“내가 조금만 더 일하면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만 더 일하면… 생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로 바뀌었다.


이것은 ‘노력 부족’이 아니라 시스템이 작동을 멈춘 징후다. 부동산과 주식, 사교육과 정규직 경쟁은

모두 중산층의 불안을 상품화한 구조다.


이 시장은

희망을 파는 대신,

불안을 거래한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GDP의 104%를 넘겼다.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자산 격차는 더 크다.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66% 이상을 보유하고 있고, 하위 50%는 전체 자산의 2.5%만을 가진다.

이는 단순한 빈부격차가 아니라

사회이동의 차단을 의미한다.


즉, 중산층이 줄어든 게 아니라,

‘될 수 있는 중산층의 길’이 사라졌다.


정치도 그 공백을 인지한다.

하지만 해법은 없다.

좌파는 분배를 말하고,

우파는 성장을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모두가 중산층을 설득의 대상으로만 대한다.

그들에게는 중산층의 삶이 아니라

중산층의 표심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산층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과 피로가 먼저 읽히는 시대가 되었다.


중산층이 사라지는 사회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흐른다.

하나는 극단의 분노,

그리고 또 하나는 조용한 체념이다.


어느 쪽이든

정치적 폭발력은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무너지는 건

사회 전체의 상호 신뢰다.


사회가 나를 돕지 않을 거라는 확신,

노동이 보상받지 않을 거라는 좌절,

그리고 ‘나 혼자 살아야 한다’는 감정.

그 감정이 중산층의 실종보다

더 무서운 사회 붕괴를 불러온다.


중산층 멸종은 예정된 결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 멸종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는 이미 작동 중이다.

그 구조는 공동체적 노력 없이,

“각자도생”만을 정답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쪼개진 개인들은

다시 중산층이 될 수 없다.

keyword
이전 05화기업은 왜 ‘윤리’를 팔기 시작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