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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인플레이션이 훔쳐간 것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물가가 아니라, 삶이었다.

by Simon park

누구도 도둑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 도둑은 새벽에 몰래 들어오지도 않았고, 대낮에도 드러내놓고 달아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우리의 노동, 시간, 그리고 꿈을 훔쳐갔다.

그 도둑의 이름은 ‘인플레이션’이었다.


1. 시간을 훔치는 도둑

하루에 한 시간 더 일했지만, 월급은 그대로였다.

지난달엔 십만원이면 가능했던 장보기가,

이번 달엔 십오만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절도’라고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물가가 올랐다고만 말한다.

정부는 기준금리를 조정하겠다고 말했고,

기업은 원가 상승 탓이라며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했다.

은행은 예금금리를 올려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이 사기극의 피해자만 점점 늘어난다.


2. 정치적 무지와 책임 회피

인플레이션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태풍처럼 갑자기 들이닥친 것도 아니고, 바이러스처럼 예측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무능과 탐욕, 구조적 불평등이 빚은 결과물이다.


정부는 통화량을 조절하고, 금리를 통제하고, 재정을 편성하는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그 권한은 점점 한쪽 방향으로만 기울었다.

“성장률 유지”, “수출 경쟁력 확보”, “시장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서민들의 구매력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깎여나갔다.


미국의 경제학자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어디까지나 통화적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책임자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책당국은 언제나처럼 책임이 없다.

부동산 정책이 망해도, 임금과 생산성이 괴리되어도,

늘 ‘글로벌 변수’ 탓이다.

국내 물가를 해외로 돌리는 그들의 능력만은 기가 막히다.


3. 가난한 자가 먼저 무너진다

인플레이션은 평등하지 않다.

월급의 80%를 생계비로 쓰는 사람과

20%를 쓰는 사람은 동일한 물가 상승 앞에서 전혀 다른 손실을 입는다.


소득 하위 20%의 가구는 물가 1% 상승에 훨씬 민감하다.

식비, 공공요금, 대중교통비, 교육비는

그들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소비인데

바로 이 항목들이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은 ‘가난한 자에게 더 무거운 세금’이다.

그것도 조용하고 치명적인 세금이다.

가장 약한 이들이, 가장 먼저 쓰러지는 경제적 흉기.

그 이름이 인플레이션이다.


4. 돈이 아니라 신뢰가 사라지는 사회

우리는 점점 계산을 멈췄다.

오늘은 5천 원, 내일은 5천 오백 원,

다다음 주엔 또 6천 원이 된다.


어차피 더 오를 테니, 내일을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

그 순간, 미래가 사라진다.

미래가 사라진 경제는 투자도, 저축도, 설계도 없다.

남는 것은 즉흥적 소비, 무기력한 포기, 그리고 근원적인 불신이다.


신뢰 없는 경제에서 민주주의는 설 땅이 없다.

돈이 아니라 사회 계약이 무너지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훔쳐가는 것은 결국

화폐의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다.


5. 도둑은 알면서도 잡지 못하는 적이다

인플레이션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 위협을 관리하고, 약자를 보호하고,

신뢰를 지키려는 노력은 국가의 최소한의 품격이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기준금리 몇 퍼센트 조정이 아니라,

시장과 시민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정직한 경제 언어다.


국민들이 체감하는 물가와 정책담당자들의 관념 사이에는

너무 큰 괴리가 존재한다.

그 틈에서 도둑은 여전히 유유히 걷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도둑이다.

그러나 그는 밤중에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뉴스와 통계, 핑계와 책임회피 속에서

합법적으로 우리를 털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성장’이라는 말에 속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가안정대책회의’가 아니라

근로자의 급여가 지켜지는 사회계약이다.

지하철 요금이 오르는 것을 뉴스에서 보기 전에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도대체 이 사회는, 누구를 위해 성장하고 있는가?”


더 많은 시민이 이 글을 본다면,

어쩌면 도둑의 이름을 이제 잊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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