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라는 이름의 윤리, 그리고 잃어버린 경계
칸트는 평생을 케니히스베르크라는 독일의 작은 도시에 머물렀다.
그의 하루는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하며 완벽하게 반복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루틴을 시계 삼아 하루를 맞췄다.
그런 칸트가 어느 날 집을 사겠다고 했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였을까.
투자? 절세? 재개발 호재?
아마도 그에게 부동산은 삶을 정돈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자기 존재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사유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한 물리적 필요로서의 공간.
즉 ‘사는 곳’이지, ‘사두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2024년 서울.
부동산은 ‘사는 곳’이 아니라 이기는 곳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도시는
집을 사면 안도감을 느끼고,
못 사면 죄의식을 느끼는 구조로 재편됐다.
20대 청년이 대출을 일으켜 구축 오피스텔을 사고,
40대 가장은 사교육보다 집값 상승률을 택하며 이사 결정을 내린다.
이들은 더 이상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집을 거쳐간다.
그 안엔 누구도 말하지 않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이건 도박이지만, 다들 하고 있다.”
이 말은 책임의 윤리를 제거하고,
불균형을 정당화하며,
공동체적 토의 대신 비공식적 도전만을 허락한다.
공무원조차 말한다.
“이 정도면 도박판이죠. 근데 빠질 수 있나요?”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더 이상
‘공급’이나 ‘공정’의 언어가 아니다.
이제 그것은
규칙을 일부러 어지럽게 만들어
불안을 상품으로 만든 시스템이다.
부동산은 공간이 아니라 속도의 문제다.
속도를 놓치면 기회를 잃고,
속도를 맞추면 수익이 생긴다.
이 구조에선
머무는 사람보다 옮기는 사람이 유리하고,
이해하는 사람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산다.
칸트가 오늘 서울에 태어났다면,
그는 매주 일요일 집을 알아보러 다녔을지도 모른다.
신념보다 시세가 중요하고,
윤리보다 등기일자가 먼저인 사회에서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은 개인의 무책임이 아니라
시장의 무관심이 만든 필연이다.
2024년 6월 현재,
서울 아파트 중위매매가는 10억 원을 넘겼다.
전국 청년층(20~39세)의 주거 자가율은 16.7%이며,
월세 비중은 사상 최고인 47%를 기록했다.
그 와중에 2023년 기준 부동산 상위 1%가 보유한 전체 토지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윤리적 질문은 사라졌다.
어떤 집은 텅 비어 있고,
어떤 집은 사람으로 넘친다.
하지만 누구도 “왜?”라고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는
윤리가 작동하지 않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정치도 시장에 무릎 꿇었다.
서울시가 민간 재개발에 손을 들고,
국토부는 조정지역을 풀며 대출 규제를 완화했다.
“투기 수요 억제”라는 단어는
뉴스 속에서 이미 삭제되었다.
그 자리에 놓인 건
“공급 쇼크”, “역전세 방어”, “수요 유도” 같은 시장 친화적 수사들이다.
정책은 숫자 안에서만 작동하고,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의 삶은 통계의 오차로 처리된다.
죄의식 없는 도박판에는
패배자가 없다.
모두가 ‘아직 지지 않았다고 믿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게임의 유일한 패자는
판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청년, 임차인, 이주민, 가족을 꾸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더 이상 불만도, 절망도 내지 않는다.
그저 게임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으로 분류될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정치에서도 제외된다.
이상한 일이다.
부동산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생존의 문제가 되는데,
정치는 그들을 점점 덜 말하게 한다.
윤리는 퇴장했고,
지표만 남았다.
그리고 그 지표는 지금도 상승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