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말보다 문장이 먼저 떠오를 때가 있다.
무엇을 본 것도 아닌데,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 펼쳐지고
무엇을 들은 것도 아닌데, 마음 깊은 데서 울림이 올라온다.
그럴 때 나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꺼내든다.
혹은 아무 페이지도 채우지 못한 다이어리의 앞장을 다시 펼친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런 조각 같은 순간들을 붙잡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가 사는 시대의 감각과 함께,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어졌다.
나는 88 올림픽과 IMF의 뉴스 속에 유년기를 보냈고,
삐삐와 PCS, CDMA가 진화하듯
기술이 성장하는 속도에 사람의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걸 목격하며 자랐다.
Y2K의 혼란과 일본 문화 개방,
리먼브라더스의 붕괴와 2002년 월드컵의 기적,
비트코인과 NFT, 그리고 이제는 AGI의 문턱 앞에 선 인류.
나는 그 모든 것을 겪은, 성장은 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시대의 산물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세대는 늘 무언가를 이루었지만,
늘 어디에선가 실패하고 있는 기묘한 감각을 품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혼란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혼란을 껴안은 채 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버렸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설명해 줄 말이 생겼다는 뜻이라면,
나는 그 말을, 이 글을 통해 남기고 싶다.
이 블로그는 메모장에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붙잡아 모으는 곳이다.
어쩌면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일 수도 있고, 그저 시대의 공기를 느낀 감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2주 뒤, 너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태어날 딸아이가 언젠가 이 글들을 읽고
“아빠는 이런 세상을 살았구나”라고 한 번쯤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건 그래서 기록이자, 유산이다.
세상을 살아낸 아빠가
너에게 보내는 인생 사용설명서 같은 것.
때론 철학처럼 무겁고, 때론 일기처럼 가벼운 말들로 써내려가는.
너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세상과 나를 동시에 기억하고 싶어서
이 기록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