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권력 의지’와 말의 배신
정치인은 왜 항상 말을 바꾸는가?
공약은 ‘약속’이 아니라 ‘기획안’이고, 신념은 ‘상황에 따른 유연함’이라며 번복된다.
국민은 속았다고 분노하고, 정치는 “여건이 바뀌었다”고 항변한다.
말의 무게가 깃털보다 가벼워졌고, 책임의 무게는 여론조사보다 약해졌다.
하지만 정치인의 언행불일치는 단순한 위선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일관되다.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이 ‘말의 파산’은
어쩌면 정치 그 자체의 구조에서 비롯된 필연이다.
니체는 “모든 생명은 힘을 원한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확장되고, 지배하고,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는 본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이 욕망의 가장 정제된 형상이다.
단지 생존이 아니라 권력을 향한 생존.
그는 대중의 지지를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고, 그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말을 유동화한다.
즉, 말은 수단이다.
도덕의 표현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다.
말을 바꾸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말을 통해 무엇을 얻는지가 본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믿고 투표한다.
우리는 정치인의 언어를 ‘신념의 지표’로 받아들이고, 공약을 ‘미래의 약속’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배신당한다.
어쩌면 더 나쁜 건, 배신을 반복적으로 당하면서도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정치는 매번 선거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꺼낸다.
약자 보호, 기회 균등, 정의 실현, 지역 균형. 그런데 선거가 끝나면 그 말들은 어디로 가는가?
예산안 속 표의 숫자로, 규제완화 보도자료의 단어로, 혹은 그저 사라지는 연기의 형태로 흩어진다.
말의 책임이 사라진 시대.
말은 소비되고, 사람은 환멸한다.
그 환멸은 정치 혐오로 바뀌고, 정치 혐오는 다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이때, 권력은 더욱 편안해진다.
무관심한 시민은 권력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지 정치인을 향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왜 여전히 그 말을 믿는가?
정치는 말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 말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런데 그 말이 조작되었을 때,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권력자는 살아남지만, 시민은 방향을 잃는다. 말이 타락하면 공공이 무너진다.
니체는 말했다. “진리는 권력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슬프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정치의 풍경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말에 속고, 또 속는다.
이번 총선에서도, 다음 대선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