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보통’에 맞춰 살도록 강요당한다
"정상"이라는 단어는 참 묘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도착점처럼 말한다. 정상 체중, 정상 혈압, 정상 가족.
의사가 “정상입니다”라고 말하면 안심이 되고, “비정상입니다”라고 하면 바로 불안해진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자.
"정상"은 언제, 누가 정했는가?
병원에서의 '정상 체중'이란 말은, 평균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표준이다.
남성과 여성, 키와 나이, 유럽과 아시아를 단순화한 수치.
통계적으로 도출된 그 수치를 기준으로, 누군가는 '정상'이 되고, 누군가는 '주의 대상'이 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 이들은 병원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조용히 ‘관리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이 모든 판단이 윤리의 이름이 아니라, 효율의 이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평균에 가까울수록 시스템은 작동하기 쉽다.
‘보통’은 예측 가능하고, 제도와 서비스는 그 보통값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기준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조정당한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길에서 차단된다. ADHD를 가진 아이는 교실에서 낙인 찍힌다.
싱글맘은 가정통신문에서 ‘부’와 ‘모’를 동시에 채우지 못한다.
정상은 배제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늘 “정상처럼 살아라”고 훈련받는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글자는 떼야” 하고, 스무 살이 되면 “대학은 나와야” 하고, 서른이 되면 “결혼은 해야” 한다.
그 리듬에서 벗어난 삶은 ‘문제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우리는 몸을 다듬고, 말을 조심하고, 감정을 포장하며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모범 답안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정상이라는 틀은, 정말 모두에게 이로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을 ‘정상 가족’ 밖으로 밀어낸 사회,
우울증이 있는 직장인을 ‘성격에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조직,
표준 이력서에서 장애 여부를 체크하게 만드는 기업들.
그들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사실
“우리 시스템에 맞지 않는다”는 선언에 가깝다.
'평균'은 수학적으로 유용하지만,
사람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다.
진짜 사회는 표준화를 지양하는 곳이어야 한다.
각자의 속도와 리듬을 인정하고, 제도가 그 다양성에 맞춰 조정되는 사회.
'정상성'이 아니라, '다양성'이 기준이 되는 사회.
“정상은 누구에게나 이롭지 않다”는 말은,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니라 우리 시스템이 틀렸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젠 질문을 바꿔야 한다.
“정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우리는 아직도 정상만을 추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