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왜 가족 흉내를 내는가?

by Simon park

퇴사 날, 팀장은 말했다.

"우린 가족이잖아. 이렇게 보내기 싫다."

하지만 사직서는 접수됐고, 사번은 정지됐으며, 명찰은 회수됐다.

가족이었다는 말은 퇴사 순간 한낱 미사여구가 된다.


회사는 왜 자신을 가족이라 부르려 할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말을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이 현상은 감정의 자본화에서 시작된다.

회식, 단합대회, 생일 파티, 사내 연애.

감정은 조직 유대감이라는 이름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이 감정은 진짜 가족애가 아니다.

그건 성과와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 연출이다.


이때부터 가족은 감정노동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보고할 때는 상사지만, 술자리에서는 형이고 누나다.

야근은 서로를 위한 배려고, 경조사는 필참이 도리다.

감정이 업무의 일부가 되고, 감정은 성과가 된다.


문제는 책임의 범위다.

가족이면 아플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직은 실수한 직원을 내치고, 병가가 길면 대체 인력을 뽑는다.

가족이라는 말은 온기와 헌신을 요구하면서도, 그에 따른 보호는 책임지지 않는다.


가족은 원래 무조건적 관계다.

하지만 회사는 조건부다.

가족 같은 회사를 꿈꾸지만, 결국은 성과 중심의 계약 공동체다.


그래서 이 말은 허구다.

"우리는 가족이다"라는 말은, 결국 이렇게 번역된다.

"우리는 당신에게 감정까지 요구하지만, 당신에게 책임지진 않겠다."


오늘도 누군가는 퇴사하며, "가족 같은 회사"를 떠난다.

아무도 울지 않는다.

다만, 서로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을 뿐이다.


회사는 가족이 아니다.

회사는 계약이고, 협상이며, 구조다.

그것을 감정으로 포장하는 순간, 책임은 흐려지고, 착취는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그러니 다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가족이 아닙니다.

우리는 동료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keyword
이전 22화정상은 누구에게나 이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