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은 쌓였는데, 삶의 방향은 더 헷갈린다”
성적은 올랐고, 자격증도 늘었다. 영어 성적도 괜찮고, 비교과 활동도 빠짐없다.
그런데 조카는 묻는다.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침묵한다. 그리고 말한다.
“그냥 다들 하니까.”
이 한마디에 지금의 교육이 담겨 있다.
‘다들 하니까’라는 이유로 10년을 살아간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을 ‘정답은 있지만 방향은 없는’ 레이스에 밀어넣는다.
나의 세대. 국초세대들에겐 익숙하다.
우리는 주입식 교육과 조기 사교육의 과도기를 지나왔고,
EBS 강의와 입시 컨설팅이 대중화되던 시절에 대학을 준비했다.
수능 성적표의 1점 차이에 울고 웃었고, 학점은 숫자였지만 취업은 운이었다.
그렇게 ‘성실히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시스템의 균열을 몸으로 먼저 배운 세대다.
그래서 안다.
지금 아이들에게도 ‘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대학을 나와도 불안하고, 취업을 해도 불안하다.
스펙은 풍부한데, 삶은 비어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경쟁의 기술은 가르쳤지만, 방향을 묻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았다.
교육은 효율성을 신봉하게 되었다.
수능은 1점 단위로, 수시전형은 항목별 가중치로, 영어는 절대평가로.
숫자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은 점점 ‘쓸모없는 것’으로 밀려났다.
질문은 사라졌다.
정답을 고르는 능력은 올라갔지만, 왜 이 문제를 푸는지에 대한 질문은 금기시됐다.
“철학은 입시에 필요 없어.”
“윤리는 점수화가 안 돼.”
“미술은 취미지, 진로가 될 수는 없어.”
이것이 2025년의 교육이 아이들에게 주는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제, 교육은 상품이 되었다.
1년에 수십억 원의 사교육비, 각종 인증 시험과 해외 봉사 프로그램, 유명 입시 컨설턴트의 커리큘럼.
교육은 공공재가 아니라 사치재가 되었고, 배움은 계층 재생산의 도구로 전락했다.
“교육은 희망의 사다리다”라는 문장은 이제 웃픈 농담이 되었다.
그 사다리는 이미 높은 곳에 놓여 있고,
밑에서 뛰는 아이들의 손은 닿지 않는다.
그러니 묻자. “지금의 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이를 위한가? 부모의 불안 해소를 위한가?
학교를 위한가? 국가 통계를 위한가? 아니면, 시스템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가?
교육이란 무엇을 아느냐보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정답을 찾는 훈련보다 질문을 품는 연습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질문이 사라진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더욱이 교육이 ‘질문하는 힘’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입시나 취업이 아니라, 삶을 위한 교육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