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를 소비하는 사람
‘공허가 아닌, 나를 위한 소비는 무엇일까?’
여느 퇴근길과 다름없었던 하루,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유튜브에 접속했다. 스쳐가는 동영상 중 우연히 멈춘 화면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그녀는 펜 드로잉을 하면서 삶의 철학을 조곤조곤 말했다. 사실 내용보다, 그녀의 펜 흐름이 내 시선을 빼앗았다. 그 순간, 나도 그리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내면의 덩어리를 표현하고 싶었던 잠재의식이었을까. 무작정 디지털 드로잉을 시작했다. 물론 고가의 태블릿을 샀다. 전공은커녕 취미로도 가져본 적이 없는 생초보였던 나는, 선연습부터 시작했다. 목표는 하루 한 시간. 수직선을 긋고, 수평선을 그었다. 때로는 곡선과 원을 그리기도 했다.
오직 선을 긋는 데만 집중했다. 비록 그림을 완성하진 못했어도, 근심도, 집착도 사라졌다. 그 시간만큼은 순수한 몰입의 순간이었다. 상품은 잠깐 머물 뿐이지만, 나를 탐색하는 시간은 오래 남았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허비로 잃는 건 돈이 아니라, 결국 나였다는 사실을.
타오르는 욕망은 언제나 중독으로 막을 내렸다. 틈만 나면 쿠팡앱을 열어 상품을 검색했다. 싼 것은 싸다고 사고, 비싼 것은 가치 있다고 구매 스크롤을 밀었다. 뜯지도 않고 책상에 던져놓는 게 일상이었다. 클릭의 희열과 택배 상자의 짧은 만족감이, 조금씩 나를 갉아먹었다. 그뿐 아니라, 수시로 앱을 열어 배송 상태를 확인했다. ‘언제 오지’에서 ‘왜 안 오지’로 바뀌는 순간, 난 이미 중독의 늪에 빠져버렸다.
한 달 치 신용카드 결제금이 월급을 넘었을 때, 비로소 경고음이 들렸다. 당장 쇼핑앱을 지웠고,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리적 공간을 정리해야 마음도 정리될 것 같은 믿음이었다. 끝없는 갈증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을 통해 실현된다는 걸, 늦게 깨달은 것이다.
욕망은 블랙홀 같다. 적당한 기준이 없으면, 점점 더 깊은 공허 속으로 떨어진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은 본래 미완의 존재다. 미완이라는 건, 내 안에 틈새가 있다는 의미다. 공허는 결핍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로 볼 수 있다. 부정하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마주할 때, 공허는 여백이 된다. 삶의 여백은 곧 가능성이다. 먹으로 그리는 한국화는 서양화와 달리, 여백을 억지로 채우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잠재성이 피어난다.
물건을 고르고, 장바구니에 가득 담아도, 그 속엔 나는 없었다. 나를 위한 소비는, 결국 나를 소비하는 것이었다. 소비가 교차하던 순간, 손끝에 남아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끌리는 취향을 탐색하고, 고유한 일상을 쌓아가던 시간. 비어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건 ‘나’의 시간이었다. 잠들어 있던 그 시간이 다시 깨어났다.
여전히 구매 욕구는 나를 시험한다. 마음이 무겁거나, 괴로울 때 유혹은 더 커진다. 그럴 땐, 다시 선을 긋는다. 형태가 없어도, 긋고 지우더라도, 그 순간의 몰입이 주는 쾌감이 좋다.
이젠 허무만 남기는 앱을 닫고, 내가 담긴 취향을 클릭한다.
그리고 나는 펜을 다시 잡는다.
잠시 흔들릴지라도, 여백 위에 나를 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