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
어제 복사, 오늘 붙여 넣기.
반복되는 일상은 서울의 풍경을 닮았다. 아파트 숲 사이, 고층 빌딩의 그림자 속에 서 있으면 여기가 강남인지 여의도인지조차 모호하다. 눈을 뜨는 시간, 흘러가는 업무, 그리고 스쳐가는 표정까지 어제인지 그제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회전접시 위 초밥처럼, 집어 먹었지만 금세 잊어버린다. 하루는 망각과 본능 속에서 겹겹이 포개진다.
퇴근길 지하철 칸에는 늘 같은 얼굴들이 앉아 있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찰나의 해방감 속 지워지지 않는 피로,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 초침은 빠르게 돌아가지만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변하는 건 계절뿐, 나는 그저 멍하니 계절을 흘려보낸다.
‘나는 감정 없는 존재일까?’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반복되는 시간이 서서히 태워버렸다. 어떤 정서는 불러보기도 전에 흩어졌고, 어떤 순간은 닿기도 전에 휘발되었다. 이젠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지루함만 선명하게 남았다. 마치 다 타버린 장작이 재만 남기듯. 하지만 불꽃은 분명히 온기를 남겼다. 단지 내가 그것을 무심히 지나쳤을 뿐이다.
소나기가 장마를 밀어낸 오후, 지하철은 늘 같은 선로를 달렸다. 창밖의 한강도, 양쪽으로 뻗은 콘크리트 건물도 조용히 제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그 사이, 미묘한 다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비 개인 하늘에 스며든 노을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똑같은 시간은 없다. 똑같은 풍경도 없다. 나는 그 단순한 진실을 일상의 무게로 덮어버리고 있었을 뿐이다. 비록 시시콜콜할지라도, 그 속엔 ‘작은 마음’은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옆자리 강 선임과 나누었던 사소한 대화에서도 ‘작은 마음’은 있었다.
“지온 선임님~“
“네, 강 선임님.“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업무에 지칠 때면 파티션 너머로 침묵을 지우던 강 선임이었다.
”저, 어제 소개팅하기로 했는데, 내일 저녁 먹기로 했어요.“
”오~일단 내일 야근은 금지, 누가 소개한 거예요?”
“배드민턴 동호회에 동갑내기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소개해줬어요.”
“부담 없이 저녁 먹어요, 인연이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네, 그러려고 고깃집에서 만나요.”
“고깃집이요? 그냥 회식이네.”
웃기기도 한 짧은 대화였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진심은 있었다. 강 선임 역시 반복되는 일상 속 사소한 변주였을 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는 작지만, 다채롭다. 각자의 환경, 지나온 경험 속에서 피어난 수천만의 이야기. 겉으로는 단조롭고 비슷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보석 같은 고유함이 숨어 있었다.
출근길에 마주친 고양이 한 마리에 미소 짓고, 점심 식당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친절에 웃는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드리운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평소 들리지 않던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풍경 속 잔잔한 정서는 내게 위로가 된다.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외면했던 것이다. 감정은 늘 곁에 있었지만, 하찮다며 밀어낸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아무 일 없는 하루에도 나는 웃은 적이 있었고, 누군가의 사소한 말에도 몰래 상처받기도 한다. 지루한 하루라고 말했지만, 분명 마음은 살아 있었다.
위대한 발견이 없어도, 눈에 띄는 성취가 없어도, 나는 분명히 느끼고, 견디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아무 일 없는 날’을 새롭게 바라보려 한다. 무덤덤한 하루에도 스쳐 지나가는 감정을 붙들어보려 한다. 언젠가 그것들이 쌓여, ‘나’라는 기록이 될 것이다. 비록 오늘도 같은 삶을 살지라도.
지루한 나날에도 분명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언제나 무심하게 흐른다.
어쩌면 내가 잃은 게 아니라, 이 도시가 지워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