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지각'되는가

멈춤이 던지는 질문 나의 사색

by 슈펭 Super Peng

사람들은 바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바쁨'은 대체 누구에게 증명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바쁜 사람을 유능하다고 여기고, 여유로운 사람을 느리다고 평가한다. 그래서일까, 쉬고 있을 때조차도 ‘잘 쉬고 있다’는 걸 어딘가에 보여주고 싶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휴식마저 경쟁이 된다.

지하철 안에서 모두가 휴대폰을 바라본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보를 흡수하지만, 정작 ‘나 자신의 생각’은 점점 사라진다. 이 현상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액체 근대'와닿아 있다.

액체 근대란 과거처럼 견고했던 사회의 제도와 공동체가 물처럼 녹아내려,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정한 상태가 된 시대를 뜻한다. 사람들은 이 불안한 유동성 속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정보를 흡수해야 하며, 이것이 '바쁨'을 증명하려는 강박으로 나타난다.


카페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심지어 마음속에서도. 조용한 순간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음악을 틀고,

영상을 켜고, 대화를 만든다. 마치 침묵이 잘못이라도 되는 듯이. 하지만 묘한 건, 가장 솔직한 생각은 늘 조용할 때 나온다는 거다.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는 진심이 잘 들리지 않는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는 ‘정답’이 아니라 ‘속도’를 사랑한다고. 무엇이 옳은지보다, 누가 더 빨리 답을 내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인생의 진짜 문제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야’ 풀린다. 천천히 기다려야만 보이는 길이 있는데, 우리는 그걸 기다릴 인내를 잃어버렸다.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는 진심이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정답’이 아니라 ‘속도’를 사랑한다고. 무엇이 옳은지보다, 누가 더 빨리 답을 내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인생의 진짜 문제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야’ 풀린다. 천천히 기다려야만 보이는 길이 있는데, 우리는 그걸 기다릴 인내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의도적으로 느려지려 한다. 일부러 대답을 늦게 하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도 그냥 두는 연습을 한다. 그때야 비로소 깨닫는다


사유는 속도의 반대편에 있다. 생각은 언제나 ‘잠깐 멈춘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걸.


하지만 멈춰 서 있는 동안, 나는 다시 더 근본적인 질문에 닿는다. 나는 지금 정말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는 삶을 영위하며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말은 사실 아주 불안정한 문장이다. 누군가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분명히 그 시야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의 나는?

그것은 여전히 ‘존재’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 속 가능성일까.

이는 철학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버클리에 따르면, 사물의 모든 속성(색깔, 모양, 소리 등)은 결국 우리의 정신 속에서 지각될 때만 존재한다. 따라서 아무도 나를 인식하거나 지각하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없다.


존재란 어쩌면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가장 불완전하고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상태다.


이 불완전한 존재처럼, 감정 또한 그렇다. 내가 느끼는 이 슬픔이 정말 ‘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감정은 몸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딘가를 떠돌다가 우연히 내 안에 들어왔다가, 다시 떠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면 문득, 내가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슬픈 것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잠시 나를 빌려 쓰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거울을 본다. 하지만 거울은 진짜 나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단지 ‘빛의 반사’ 일뿐이다. 우리는 흔히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다르다는 '조하리의 창'과 같은 심리학 모델을 접한다. 더 나아가, 안면 인식 장애처럼 얼굴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나와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도, 남에게도 완벽한 진실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과정 자체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다. 사진 속의 나는 이미 과거에 갇힌 순간이고,

영상 속의 나는 목소리만 남은 껍질이다. ‘지금의 나’를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나라는 존재는 항상 나 자신보다 한 박자 늦게 살아가는 존재 아닐까.


이처럼 나 자신조차 포착할 수 없는 존재라면, 우리가 굳게 믿는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도 비슷하다. 진실은 ‘사람들이 동시에 믿는 무언가’ 일뿐이다. 누군가 그 믿음을 깨면, 진실은 쉽게 무너진다. 결국 진실이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며 잠시 생겨나는 짧은 현상 같다.


시간 역시 믿기 어렵다. 우리는 초침을 보고 흐른다고 말하지만, 정작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지도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건지도 모른다. 카페에서 예전 음악이 흘러나올 때 갑자기 '지금'이 '과거'로 휘청거리는 감각처럼, 우리의 의식 속 시간은 늘 뒤돌아가고 멈춘다.


이 모든 불확실성의 끝에서, 나는 문득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은 사라짐일까, 아니면 다른 방식의 존재일까. 나는 가끔 꿈에서 오래전 떠난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여전히 웃고, 말을 걸고, 나를 바라본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존재란 결국 ‘기억되는 일’이고, 죽음이란 단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일’ 일지도 모른다.



존재의 지속과 '원래'의 허구로의 심화

존재란 결국 머무름이 아니라 '사라짐의 지연'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에 더 가깝다. 그 말속엔 묘한 슬픔이 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만, 동시에 이미 조금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 사라짐 속에서도 무언가는 남는다. 존재란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한순간의 진동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유동적인데도, 우리는 굳이 ‘원래’라는 말을 붙잡으려 한다.


"원래"라는 말은 존재하는가? 과학은 그것이 허구임을 증명한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동설처럼, 과학적 지식은 칼 포퍼의 주장처럼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반증되지 않았을 뿐인 잠정적인 가설이다.

언어학에서도 '어여쁘다'가 원래 '불쌍하다'는 뜻이었듯 유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험한 형태는 바로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문장이다. 이 말은 자신의 책임과 노력의 필요성단숨에 소멸시키는 심리적 방패이다. 실패 시 자기 불구화(Self-Handicapping)를 통해 충격을 완화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성장과 반성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과거에 기댄 채 지금의 나를 포장하고, 성장과 변화라는 고귀한 고통을 회피하려 애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속도를 늦춘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머물며 묻는다. 나는 지금 정말 ‘존재하고 있는가?’ 혹은 그저 흘러가는 것들 속에서, 조용히 증명되지 못한 채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야 조용한 답이 돌아온다. 사유는 속도의 반대편에서 피어난다. 존재는 그곳에서 비로소, 가장 선명해진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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