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잠시 노트북을 덮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턱 아래에 댔다.
서재 창가로 늦가을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교수님, 그런데요..."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과학이 그렇게 계산으로만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더 본질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최영도 교수는 잔잔히 웃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수현 씨."
그는 찻잔을 살짝 들어 남은 차를 음미하듯 한 모금 마셨다.
"사실 그게, 우리가 오늘 얘기하려던 시작이었죠."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언제부터 자연을 이해하려 애써왔을까요?
아주 오래전부터였겠죠.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 달이 왜 하늘을 도는지, 자석이 왜 서로 밀고 당기는지...
그런 질문들은 늘 인간 곁에 있었으니까요."
수현은 노트북을 다시 펼치며 교수의 말에 집중했다.
긴장했던 표정이 어느새 조금 풀린 듯 보였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17세기, 뉴턴은 그 질문들에 답을 주려 했습니다.
그는 중력을 발견했죠. 질량을 가진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그 힘을 거리와 질량으로 계산했어요."
교수의 시선이 창밖 나뭇잎 사이로 잠시 머물렀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어요.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힘과 달이 지구를 도는 힘을 같은 법칙으로 설명하다니요.
그런데도 뉴턴은 말했죠.
'나는 중력이 무엇인지 가정하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
즉, 왜 질량이 질량을 끌어당기는지는 모른다고 고백했어요.
다만 어떻게 끌어당기는지만 계산해 냈을 뿐이죠."
수현은 메모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왜'를 묻기 시작한 거군요."
최교수는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맞아요. 19세기 물리학자들은 중력뿐 아니라 빛과 전자기 같은 힘의 전달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알려진 자연 현상들은 모두 매질을 통해 전달됐으니까요.
소리는 공기를 통해 퍼지고, 물결은 물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잠시 교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렇다면 빛과 중력도 무언가를 통해 전해지는 것 아닐까?
이 질문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에테르(Ether)입니다."
에테르는 우주를 가득 채운, 그러나 감지할 수 없는 매질로 상상되었다.
빛의 파동은 이 에테르를 통해 전달되며,
중력 같은 원격 작용도 그 속을 통해 전해질 것이라 여겨졌다.
소리는 공기를 통해, 파도는 물을 통해, 진동은 고체를 통해 전달된다.
자연 속 모든 힘과 움직임은 언제나 '매개하는 무언가'를 거쳐 전해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빛이나 중력이 그 어떤 접속 없이,
완전히 빈 공간을 가로질러 간다고?
이것은 당시 과학자들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었다.
"에테르는 약 200년 넘게 과학을 지배했어요."
최 교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1887년, 마이켈슨-몰리 실험이 그 가설에 치명적인 의문을 던졌죠.
빛의 속도가 에테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게 확인되자,
과학들은 에테르 없이 빛을 설명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수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아인슈타인이 등장한 건가요?"
"맞아요."
최 교수는 찻잔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참 놀라운 일이죠."
그는 잔을 내려놓고 잠시 손끝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존재하지도 않는 물질을, 그것도 당대 최고의 과학들이 200년 넘게 믿어왔다는 것.
지금 와서 보면 웃음이 나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그게 과학의 약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최 교수의 표정이 잠시 진지해졌다.
"관찰하고, 탐구하고, 실험하는 과정을 통해,
한때 절대 진리처럼 보이던 것조차 무너질 수 있다는 점.
그게 바로 과학의 본질이고, 발전의 원동력이죠."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중력마저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아인슈타인에게 중력은 힘이 아니라, 시공간의 곡률이다.
질량을 가진 물체는 주변 시공간을 휘게 하고, 다른 물체들은 그 휘어진 공간을 따라 움직인다.
달이 지국 주위를 도는 것은, 지구가 만든 휘어진 공간을 따라 '직진'하는 것이다.
즉 질량이 만든 공간의 성질로 중력의 효과를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중력의 본질을 밝혀낸 건가요?"
수현의 눈빛이 반짝였다.
최 교수는 살짝 웃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현대 물리학은 여전히 중력의 본질을 묻고 있습니다.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서로 양립하지 못하고,
끈이론이나 양자중력 이론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수식 속에 머물러 있죠.
그리고 다중우주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주의 본질을 향한 상상이고, 아직은 검증 불가능한 가설입니다."
수현은 잠시 멈춰 생각에 잠겼다.
전자기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은 양자장 이론으로 잘 설명된다.
그러나 중력만은 여전히 고전이론으로 다뤄진다.
과학이 만든 개념들 — 필드, 시공간, 끈, 다중우주 — 이 모두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이다.
그것이 진짜 실체인가, 우주가 정말 그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는 아직 모른다.
우리는 그저 관측 가능한 것을 측정하고, 패턴을 찾아내고, 수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엉뚱한 가설도 내지만,
그 모든 시도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려 한 노력의 흔적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이렇게 말했어요."
최 교수가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수현은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깐, 과학은 결국 질문의 연속이군요."
최 교수는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그 질문이 멈추지 않는 한, 과학은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거예요.
하지만 본질에 닿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죠.
그게 과학의 아름다움이자, 과학의 한계예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시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인간 정신의 창조물인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할 용기가 없다."
아인슈타인의 이 말은, 우리가 아무리 깊은 수식과 정교한 이론을 만들어도,
그 이론이 우주의 본질을 완전히 보여주는 창이라는 보장은 없음을 일깨운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해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