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교수님, 과학은 점점 더 세부로 파고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항상 좋은 건가요?"
최영도 교수가 잔을 내려놓았다.
"좋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죠. 우리가 흔히 '환원론'이라고 부르는 접근입니다.
복잡한 것을 잘게 나눠서 이해하는 방식이죠."
환원론은 복잡한 현상을 더 작은 단위로 쪼개 분석한다.
생명을 세포로, 세포를 분자로, 분자를 원자로 나누어 설명하는 식이다.
이 방식은 전자기학, 분자생물학, 양자역학 같은 현대 과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잘게 나누다 보면 조각은 알지만, 전체 그림을 놓칠 수 있다.
뇌의 뉴런 작동 원리를 알아도, '의식'이 왜 생기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전체를 보는 방법도 필요하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최 교수가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이게 '전체론'입니다. 시스템 전체를 하나의 맥락과 관계망 속에서 이해하는 거죠.
양자정보 연구나 생태학, 복잡계 과학이 이런 접근을 합니다."
전체론은 '부분의 합이 곧 전체'라는 가정을 깨뜨린다.
전체는 단순한 합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성질이 나타난다.
개별 물분자의 성질만으로는 '물의 흐름'을 설명할 수 없다.
카오스 이론은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가 결과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복잡계 과학은 수많은 요소가 얽혀 예측 불가능한 패턴과 창발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탐구한다.
기후 변화 모델을 보자.
대기, 해양, 빙하, 생태계가 얽힌 거대한 네트워크다.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 바닷물의 염도와 해류가 변하고, 이는 곧 지구의 바람 패턴까지 바꿔 놓는다.
부분만 분석하면 장기적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다.
전염병 확산 연구도 마찬가지다.
바이러스의 분자 구조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어떤 도시로 이동하는지, 사회 구조와 환경 요인이 어떤 경로를 만드는지까지 함께 살펴야 실제 확산을 예측할 수 있다.
수현이 물었다.
"그럼 환원론과 전체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요?"
최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둘 다 필요합니다.
세부를 모르면 전체를 이해할 수 없고, 전체를 보지 않으면 세부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과학은 두 시선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의 규칙을 설명한다.
그 위에서 양자정보과학은 시스템 전체의 특성을 다룬다.
시스템 생물학은
유전자, 단백질, 세포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면서도,
네트워크와 환경 속에서 이를 통합한다.
뇌과학은 뉴런의 작동을 넘어서,
의식, 사회, 문화까지 고려하는 '통합 뇌과학'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미시와 거시,
분석과 통합을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과학의 길이다.
하지만 통합적 접근도 쉽지 않다.
방대한 데이터, 복잡한 모델의 불확실성, 학문 간 언어와 방법론의 차이들이 여전히 장벽이다. 전체를 설명하는 거대한 모델이 오히려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거나, 현실 적용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결국 과학은 기술적 한계를 넘어서, 질문의 본질과 해석의 맥락을 함께 성찰하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수현이 미소 지었다.
"결국, 현미경과 망원경을 같이 써야 하는 거군요."
"맞아요."
최 교수는 창밖을 바라봤다.
"뉴턴이 세상을 수학의 언어로 그렸고,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의 그물망을 펼쳐 보였으며,
양자역학이 그 그물망의 올 사이를 비추었죠.
복잡계와 카오스가 질서와 무질서의 춤을 보여주었고,
진화론과 DNA가 생명의 문법을 밝혔습니다.
이제 과학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건 부분과 전체, 미시와 거시, 분석과 통합을 하나로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일 겁니다."
그는 잔을 들어 마무리했다.
"앞으로 과학은 한 분야의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물리학자가 생물학의 문법을 이해하고, 생물학자가 정보과학의 언어를 배우는 시대가 오겠죠.
AI와 빅데이터, 시뮬레이션과 실험, 미시와 거시를 넘나드는 연구가 당연해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어느 쪽이 맞는가’를 묻지 않을 겁니다.
대신, 서로 다른 조각들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더 큰 그림을 보게 되겠죠.
그게 아마 다음 패러다임의 시작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