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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숨겨진 핵

by 홍종원

서울 한남동의 비밀 게스트하우스는 새벽부터 경계가 삼엄했다. 외교부 차량으로 위장된 검은 세단이 조용히 골목으로 들어섰다. 차 문이 열리자 낡은 회색 코트를 입은 사내가 내렸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박철호. 전쟁을 끝내지 못한 세대의 마지막 인물이자, 누구보다 신중한 협상가였다.


그의 입국 사실은 청와대 내부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원만 알고 있었다. 윤현우 대통령은 지하 벙커에서 회담장 주변을 비추는 실시간 감시 화면을 확인하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회담은 국가의 미래를 가를 한 수였다.


박철호가 한 걸음 들어섰다. 수행원 둘이 뒤따랐지만, 방 안은 숨조차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윤현우 대통령과 서지훈 안보실장은 말없이 그를 맞았다. 인사도 의례도 생략된 자리였다.


박철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통령 동지, 이제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끝의 떨림이 미세하게 감지되었다.


백두산 폭발 직전, 우리는 한 가지를 숨겼습니다. 미국도, 중국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윤현우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박철호는 회색 서류봉투를 꺼내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당신들의 손에 맡기고 싶습니다.


서류봉투 안에는 낡은 지도가 들어 있었다. 오래된 종이 위에는 붉은 선이 몇 겹으로 그어져 있었고, 세 개의 지점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그 선들은 공식 지도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은 길이었다. 미국·중국·러시아가 나눠 점령한 관리구역의 경계 밖, 어느 국기도 꽂히지 않은 계곡과 능선들이었다.


박철호는 지도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두산이 흔들리기 전, 우리는 핵탄두 전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은 외국의 관리구역이 아닙니다. 공식 지도에도 이름조차 없는 땅이지요. 지금은 남쪽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합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거의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분화가 시작되며 하늘을 뒤덮은 연무와 화산재가 모든 감시망을 가렸습니다. 위성도, 정찰기도 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동은 완전히 은폐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을 지킬 힘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남쪽이 맡아야 할 때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윤현우는 묻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지도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좌표를 따라갔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그 방을 짓눌렀다.


“이 정보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윤현우의 물음에 박철호는 짧게 대답했다.
이제는 믿는 쪽만이 살아남습니다.


그날 밤, 국방부는 암호명 ‘청운 작전’을 발동했다. 작전은 단 한 줄의 명령으로 시작됐다.
‘지시된 좌표로 즉시 이동. 대상 확인 후 보고. 기밀 유지.’


군 헬기 세 대가 새벽 어둠을 가르며 북부 산악지대로 향했다. 그들은 눈으로 덮인 깊은 협곡에 착륙했다. 헬기 소리가 사라지자, 산맥 전체가 숨을 죽인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특수부대원들은 감지기와 탐지기를 들고 눈을 헤치며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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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을 수색한 끝에, 대원 한 명이 눈 속에 묻힌 거대한 암벽 구조물을 발견했다. 자연 동굴처럼 보였지만, 입구에는 두꺼운 철제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녹슨 자물쇠, 굳게 닫힌 문. 폭약 대신 절단기로 문을 잘랐을 때, 기다렸다는 듯 내부에서 차가운 금속 냄새가 새어 나왔다. 대원들이 손전등을 켜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었다.


동굴 전체가 거대한 저장고였다. 천장까지 닿을 만큼 높고 넓은 공간 안에, 군용 컨테이너들이 수십 개 층층이 쌓여 있었다. 컨테이너마다 군사 표식은 사라진 채, 번호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첫 번째 컨테이너를 열자, 내부는 진공 보관고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회색 방호 캡슐들이 줄 맞춰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단단히 고정된 은빛 핵탄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눈앞의 진실이 모든 사실을 대신하고 있었다.


‘확인했다. 코드명 01, 보존 양호.’
무전이 짧게 울렸다. 본부의 응답은 단 한마디였다.
‘복귀하라.’


그러나 그날 새벽, 작전은 ‘복귀’로 끝나지 않았다. 철통이 발견된 계곡 일대는 즉시 군의 통제구역으로 선포되었다. 산맥 입구마다 검문소가 세워지고, 인근 마을 주민들은 긴급 대피 조치를 받았다. 표면상 이유는 ‘지질 붕괴 위험 지역 지정’이었으나, 실제 목적은 완벽한 봉쇄였다.


청와대의 비밀 명령에 따라 공병대와 방호부대가 투입되었다. 그들은 접근 도로를 차단하고, 감시용 열화상 장비와 드론 정찰망을 설치했다. 공중에는 탐지 위장막이 깔렸고, 지상에는 이동식 방사능 차폐막이 세워졌다. 이 지역은 지도로도 지워졌다. 누구도, 심지어 미군 정보부조차 그곳의 좌표를 알 수 없었다.


윤현우 대통령은 직접 보안실에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은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십시오. 동맹국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백한 손끝을 조용히 쥐었다.
“이건 무기가 아닙니다. 다만 보류된 선택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지는 반드시 우리가 통제해야 합니다.”


봉쇄 지역은 하루 만에 요새로 변했다. 야간 감시부대가 순찰을 돌고, 전자전 차량이 상시 대기했다. 혹시 모를 침입이나 폭발 시도를 대비해 다층 방어망이 구축되었다.
모든 명령은 ‘공식 기록에 남기지 않는다’는 단서 아래 내려졌다. 보고 체계는 폐쇄적이었고, 무선 통신조차 암호로 겹겹이 보호되었다.


누군가 물었다.
“왜 미군에게 알리지 않습니까?”
윤현우는 짧게 대답했다.
정보는 곧 힘입니다. 지금은 아직 우리 손에 두어야 합니다.


청와대 지하 보안실에는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작전 종료 보고를 받은 윤현우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에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우리는 협상할 힘을 가졌다.


서지훈 안보실장이 묻듯이 시선을 들었다.
“외부에는 어떻게 보고합니까?”
보고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답은 단호했다.


며칠 후, 미국과 중국의 외교 채널에서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들은 공식 보고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위성 정보망이 미세한 이상 징후를 포착했다. 미·중·러의 관리선이 닿지 않는 북부 산악지대, 통신이 닿지 않는 그 무명 구역에서 순간적인 열신호와 전자파 교란이 감지된 것이다.


분석 결과는 불완전했지만, 각국의 정보 당국은 직감했다. 무언가가 움직였고, 그것은 단순한 군사훈련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국가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이 새로운 균형의 문턱에 올라섰다는 것을.


윤현우는 대통령 일지에 한 문장을 남겼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균형으로 맞설 것이다.
그 문장은 역사에 남지 않았다. 단지 그의 서랍 속, 잠금장치가 걸린 붉은 노트 안에만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고 있었다. 일본은 핵 확산 회의에서 돌연 발언을 자제했고, 중국은 압박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미국 역시 ‘동맹의 자율적 방위력 강화를 존중한다’는 모호한 성명을 냈다.
그 말의 의미는 하나였다. 이제 한국은, 핵 없는 핵보유국이었다.


박철호는 협상 이후 서울 북쪽의 임시 거처에 머물며, 조용히 신문을 읽었다. 한 기자가 쓴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균형의 시대가 오는가.”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야 시작이지.”


밖에서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땅 아래에서는, 이미 또 다른 계절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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