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도, 인생도 자꾸 되새김질하는 나에게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어간다. 많은 관심은 받지 못하지만 하나의 글을 올리고 여러 개의 여운을 나 혼자서 며칠씩 끌어안는다. 지난 화의 글 역시 여러 차례 다시 읽어보았다. 키보드에서 열기가 식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내 눈에는 아쉬운 점만 보인다. 내 글이 썩 이뻐 보이지 않는다. 이게 바로 법륜 스님이 말하는 사랑고파병(?)일까.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자꾸 키보드에 다시금 손을 올리게 만든다.
웃긴 일이다. ‘무엇이든지 좋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웃으며서 받아들이자’고 글을 쓴 지 하루 만에 그 마음이 흔들리다니. 넘어지더라도 중요한 건 다시 일어나서 걷는 것이지만 이건 뭐 너무 자주 넘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이래서 평소 갈고 닦은 맷집이 중요한가 보다. 내 맷집이 잘 버텨주길 바란다.
지지난 화에서는 풋살과 관련된 글을 올렸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이 책을 펴고 읽기 시작하다 보니 야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나와 비슷한 지점이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 작가는 야구를 만났다. 우연히 갔던 야구장에서 느꼈던 그 날의 짜릿함으로 그의 인생에 하나의 조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나 공을 받아주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던 그는 어른이 되어 사회인 야구팀에서 자연스럽게 포수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린 시절 느꼈던 기쁨과 순수한 즐거움은 사라지고 성적, 타격폼, 타율 같은 욕심만이 남았다. 그래서 작가는 어린 시절 야구를 되찾아보기로 했다. 야구에서 느꼈던 소소하고 잔잔한 기쁨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힘을 빼기 시작했다. 머리를 비우고 어깨에 힘을 빼고 타율 기록이나 승패는 내려놓는 마음. 작가는 그걸 '무심타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타율이 오르기 시작하고 팀은 8연승을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능력을 뛰어넘어 잘하려고 할 때는 그렇게 안 풀리던 야구가 능력을 인정하고 마음을 비우니 능력 이상의 성적이 나오는 것이다. 야구의 소소한 즐거움도 즐기면서 말이다.
나 역시 풋살을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났다. 우연히 동네에서 몇 되지 않은 친구들과 골대도 없이 낡아빠진 축구공 하나를 차면서 느꼈던, 몰입하면서 찾아왔던 그 감각이 지금까지도 공을 차게 했다.
그런데 왜 잊고 살았을까, 그 감각을, 그 몰입을
왜 무심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인정받고자 하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과정을 잊게 만들고 결과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작가도 공을 제대로 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야구에서 타격은 보통 파도에 비교된다고 한다. 타격 페이스가 파도처럼 올랐다 내려갔다를 반복해서 언제는 휘두르는 대로 안타가 되기도 하고, 언제는 아무리 보고 휘둘러도 허공을 가를 때가 있단다. 인생과 다를 게 없다. 아무리 피하려고 한들 굴곡이 없는 삶이 있으랴.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흔들리며 피는 꽃인 것이다.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충만이 있으면 결핍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아니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있고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결핍이 있어야 충만이 있고
죽음이 있어야 삶이 있다.
그러니 파도가 있어야 고요한 바다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작가는 그 파도를 인정했을 때 비로소 '무심' 타법을 하게 되었다.
행복해지는 것이 강박같이 여겨지는 요즘
어쩌면 행복보다 필요한 것은 '무심'이 아닐까.
쉽지는 않다. 우리의 마음은 '유심'이 익숙하니까.
그렇게 배워왔고 살아왔고 그렇게 존재 가치를 인정받아 왔으니 말이다.
지난 화의 글은 나에게 유심인 듯 하다.
이쁘진 않지만 나의 자식인 걸 어찌 하겠는가
그래서 힘을 빼고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