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결혼할까? -8
"우리 결혼할래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꺼지고 경쾌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소리가 일제히 멈추었다.
마치 이 넓은 공간에 그와 나만 존재하듯 조용한 주변의 공기는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했다.
"서은 씨, 내 말에 많이 놀랐어요?"
"서은 씨?"
탁, 그제야 다시 조명이 켜지고 '슴'의 밝고 경쾌한 음악소리가 내 귓가에 와서 맴돌았다.
"아, 아니에요. 지금 결혼이야기가 저에게는 너무 뜬금없어서.."
"미안해요. 놀랐다면."
그 사람은 레몬티가 담긴 찻잔으로 손이 가려다 말고 옆에 놓인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 앉은 사람은 그동안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속의 어린 시절 친구가 아닌 내가 선을 보러 나온 남자였다. 잠시 내가 착각에 빠져 마치 어린 시절 헤어졌던 친한 친구를 만나러 온 것마냥 추억에 빠져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얼굴이 뜨겁게 확 달아올랐다.
"이 자리 순전히 서은 씨 때문에 나왔어요. 엄마가 매번 선보라는 소리 정말 싫었는데 아줌마가 서은 씨 한번 만나보라는 소리에 고민도 많이 했지만 내가 알던 서은 씨라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하고 나왔어요."
"어떤 마음이요?"
"저는 결혼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서은 씨와 결혼하고 싶어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혼생각이 없는데 결혼하자는 건.."
"네, 맞아요. 그냥 우리 결혼의 형태만 갖추자는 거예요. 제가 너무 무례한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도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나를 거절해 주길 바랐다. 나 역시 비혼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만남과 결혼은 원하던 게 아니었으니까.
"계약결혼을 하자는 거예요?"
"계약결혼..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냥 우리만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결혼을 하자는 거예요."
우리만 공유할 수 있는 결혼이라고. 엄마를 속이고 어쩌면 나 자신마저 속여야 할지 모르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는 잠시나마 추억에 빠져서 제대로 현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아니요. 아니에요. 이런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오늘은 어릴 적 친구를 만났다는 것에 의의를 두겠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저는 서은 씨라면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계속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네, 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그 사람은 말없이 웃었다. 그 미소는 여전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웃음, 그리고 어색함.
그때였다. 우리가 앉은자리 창가에서 똑, 똑하는 소리가 들렸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당황했던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악!"
내 입에서는 조그맣게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곱슬머리에 얼굴이 까만 사람이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 녀석이 저기에 왜 있지? 죄송해요.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카페 문을 열고 나가서 곱슬머리 남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친한 사이인 듯 무척 즐거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릴 적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키만 훌쩍 커버린 어린 남자아이. 나는 홀린 것처럼 그 사람을 계속 바라보았다.
곧 만남이 끝난 듯 그 사람은 다시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 카페 콘셉트 속 자유분방하지만 다소 클래식한 그 의자에.
"미안해요. 회사친군데 길 가다가 우연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봤나 봐요. 워낙 장난기가 많은 친구라 서은 씨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나는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멋쩍은 대답을 했다.
"우리 그만 일어날까요?"
우리는 주변을 정리하고 함께 카페문을 열고 나왔다.
아직 하늘에는 빗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비는 내 머리에도, 어깨에도, 그 사람의 몸에도 작은 흔적들을 남겼다. 그 사람이 건넨 작은 접이식 우산을 거절하고 나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방울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뒤에서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의 눈길이 오래도록 느껴졌다.
우리 결혼할래요?
그 목소리가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우리만 공유할 수 있는 결혼. 세상에 그런 결혼은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