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우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9

by K기노

그날은 정확히 6월 16일이었다.

내가 날짜까지 잊지 않고 또렷이 그날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다음 날이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은 철저히 봉인되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것이 해제되는 순간 또 다른 진실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 꽁꽁 감춰두었던 그것은 지금까지도 강박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외출하고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무척 흥분된 상태였다.

헝클어진 머리, 충혈된 두 눈, 검붉은 피딱지가 생긴 주먹과 싸하게 풍겨오는 술 냄새는 나를 묘하게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런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엄마를 찾았다. 그리고 이내 엄마 곁에 있는 나를 발견하자 욕실 옆 서랍장에 고이 접어둔 수건 하나를 빼내 나에게 쥐어주며 욕실로 이끌었다.

"얼른 들어가서 씻어. 그리고 아빠가 나오라고 하기 전까지 절대 나오지 마. 알았지?"

나는 두려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수건을 쥐어주던 아버지의 얼굴은 난생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수건을 들고 선 나는 어쩔 수 없이 욕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씻으라고 말을 했지만 나는 수건을 둥글게 말아 쥐고는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얼굴로 나에게 손까지 흔들며 집을 나선 아버지에게 그 사이 무슨 큰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했다.

나의 두려움은 알지 못하는 구석구석을 훑어가며 상상을 만들어냈다. 그 상상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내가 앉아있는 자리 양 옆의 벽들이 나를 향해 돌진하듯 가슴이 조여왔다.

조금 뒤 밖에서는 큰소리가 났다. 그리고 유리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엄마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내가 있는 욕실까지 새어 들어왔다. 나는 아버지의 당부도 잊은 채 욕실 밖으로 나와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엄마는 바닥에 쓰러진 채 울고 있었다. 바닥에는 피로 보이는 붉은 액체도 흘러있었다.

엄마에게 달려온 나를 본 아버지는 내 어깨를 잡아 거칠게 몰아세웠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아빠가 나오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오지 말라고. 그런데 왜 내 말을 듣지 않은 거야?"

아버지는 내 손목을 잡고 다시 욕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풀고는 욕실 선반에 올려두며 말했다.

"자, 봐. 지금 시간이 8시 45분이야. 너는 여기서 10시까지 씻고 나오는 거야. 알았지?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절대 10시가 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나오지 않는 거야. 절대로. 아빠가 무슨 말하는지 알지? 10시가 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꼭 명심해."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나를 욕실 안에 놓아두고 서둘러 나갔다. 나는 아버지의 말대로 옷을 벗어 선반에 올려두고 얼른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이 내 얼굴과 귀를 뒤덮어 먹먹해지기를 바랐다.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를. 아무도 이 공간 속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틀어놓은 물줄기를 따라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귀에서는 웅웅 거리는 이상한 박자가 느껴졌다. 그것은 왜곡되었거나 우주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심장소리였을까.

지금 다시 욕실 밖으로 나간다면 그곳에서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피가 낭자한 채 거실바닥에 쓰러져 있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두려웠다.

10시까지만. 아버지는 분명 내게 10시까지라고 했다. 나는 선반에 놓인 아버지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9시 30분이었다. 아버지가 말한 10시가 되기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준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았다. 구석구석 한 방울의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닦고 또 닦았다. 선반 위에 올려둔 옷을 꺼내 입고 닫힌 변기 뚜껑 위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10시가 되기 전까지 샤워기의 물을 잠그지 않았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멈추는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서 상상으로만 맴돌며 충돌하던 그것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와 나를 트라우마 속에 가둬버릴 것만 같았다.

욕실 안은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찼다. 뿌연 수증기 안에서 내 표정은 알아볼 수 없게 감추어버렸다. 내 모든 것을 숨기기 위해 온몸과 얼굴은 축축한 땀으로 젖어들었지만 나는 샤워기의 물을 잠글 수도, 그렇다고 10시가 되기 전까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드디어 10시가 되는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10초, 9초, 8초....... 3,2,1초.

숨을 크게 내 쉬고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비틀어 문을 당겼다. 순간 내 얼굴을 차가운 공기가 할퀴듯 훑고 지나갔다. 활짝 열린 창문 안으로 불어온 늦은 밤 아직은 찬바람에 몸은 부르르 떨리고 정신은 아찔해져왔다.

거실로 나가자 집 안은 조용하고 고요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변은 깨끗하게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마치 악몽에서 깨고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역시 아버지가 제시했던 10시라는 시간이 되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진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 나는 안도했다.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9화아주 사적인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