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약속 -11
엄마와 마주 앉은 그 사람은 본능적으로 팔과 몸을 앞으로 내민 채 엄마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딸인 나보다도 어쩐지 엄마와 함께 한 모습이 덜 이질적인 것을 보면 지금 이 공간에서 가장 불편한 공기를 내뿜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제껏 엄마와의 공간을 불편해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나. 아니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는 타인의 모습을 내가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낯설고 또, 슬펐다.
"넌 여전히 친절하구나. 그대로야."
엄마의 미소는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예전에 내가 눈이 빨개져서, 그러니까 아이처럼 약한 모습을 너에게 들킨 적이 있었지? 그때 창윤이 네가 아줌마 왜 울어요? 그렇게 나에게 물었잖아."
"그때 아줌마는 너무 슬퍼 보였어요. 그런데 왜냐는 내 질문에 아줌마는 대답 대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맞아. 그때 너는 나에게 별별 이야기를 다 했었지. 내 옆에 나란히 앉아서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 또 누구누구가 말썽을 피워서 선생님께 혼이 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가끔씩 우리 서은이 이야기까지.. 종종 네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기분이 좋아졌어. 어린 네가 들려주는 일상 속 이야기들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거든."
엄마는 그 사람과 공유하는 기억들을 풀어놓으며 웃었고 즐거워 했고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없던 나는 그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아, 너희들 배고프지? 잠깐만."
엄마는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김치찌개와 갈비찜, 잡채까지 내어놓았다.
"엄마, 김밥은 뭐야?"
"창윤이가 내가 싼 김밥을 먹고 싶어 한다고 창윤이 엄마가 그러잖아. 그러니 내가 준비 안 할 수가 있니?"
엄마는 신이 난 듯 보였다. 딸인 나보다도 어쩜 그 사람을 더 기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함께 엄마의 집을 나왔다.
"엄마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그때의 서은 씨도 많이 불안했었죠. 서은 씨는 너무 어렸고 그게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 들여다볼 여유도, 슬픔에 다가갈 자신도 없을 때니까.."
"엄마가 창윤 씨와 있으니 많이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어요. 저에게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많이도 장착했더라고요."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흠칫 놀랐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한 경계를 내려놓고 마치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노출해 버린 것만 같았다.
"우리 엄마는 매일 바빴어요. 서은 씨도 잘 알겠지만 카센터를 했었잖아요. 가게에 가면 계속 볼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항상 엄마의 손길이 부족했었어요. 최근에 엄마와 한 번 다퉜던 일이 있었는데 내가 또 엄마의 아픈 상처를 긁어버렸죠. 서은 씨 어머니가 엄마 대신 싸주셨던 소풍 김밥 이야기까지 꺼내가며 엄마의 속을 헤집어 놓았는데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하고 아줌마가 김밥까지 준비해 두셨을지는 몰랐네요."
그 사람도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 사람의 얼굴은 유난히 반짝거리고 빛이 났다.
"그리고 아줌마의 김밥은 여전히 정말 맛있었어요."
어린아이 같았다. 그때의 어린 창윤처럼 보였다. 낯설지만 익숙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창윤 씨의 제안 아직 유효한가요? 결혼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그 사람은 웃음기를 그치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이유는 딱히 없어요. 그리고 내일이 되면 후회하고 무르자고 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냥 모두가 편안해지는 방법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엄마까지도."
내가 결혼이야기를 꺼내고 난 뒤부터 우리는 아무 말없이 걸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이야기들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함께 있었지만 마치 다른 생각 속의 그물에 걸린 사람들처럼 우리는 각자의 감정 속에 발을 담그고 그 길을 나란히 걸었다.
"서은 씨가 전혀 불편하지 않도록 할게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우리의 약속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