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우리

이야기를 마주 하는 시간 -26

by K기노

경쾌하게 들리던 티브이 소리가 소란스러운 소음이 되어 귓가를 어지럽혔다. 예능 프로그램 속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리모컨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그새 더 굵어진 빗방울들은 짙은 어둠을 몰고 왔고 음소거가 된 바깥풍경은 고요함이 내려앉아있었다. 머그컵을 씻은 뒤 컵 거치대에 올려놓고 집 안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깔끔함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유난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저 잠옷을 벗고 편안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거울을 보고 얼굴과 헤어 상태만 체크한 뒤 그 사람을 기다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소파에 앉아 마음을 다스렸지만 시계 초침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심장소리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딩동,

현관 벨소리가 들리고 인터폰 화면 속에는 그 사람이 또렷이 들어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살짝 상기된 듯 발그레진 얼굴의 그 사람이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창윤 씨, 들어오세요."

"미안해요. 갑자기 찾아와서.."

"아니에요."

그 사람의 다른 손에는 작은 우산이 들려있었지만 비를 제대로 피하지 못한 듯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재킷에는 빗자국들이 고스란히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뽀송한 타월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닦아냈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잠깐 들렀어요. 서은 씨가 어떤 맥주를 좋아할지 몰라서 제일 무난한 걸로 이것저것 담았어요. 과자랑 버터구이 오징어도 사고요."

수줍은 듯 말하는 그 사람을 앞에 두고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네,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나는 그에게서 재킷을 받아주려 했지만 그 사람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대신 옷걸이 하나를 부탁했고 내가 평소 외출복을 걸어두는 옷 행거에 재킷을 걸어두었다. 그 사이 나는 그가 사들고 온 과자와 버터구이 오징어를 먹기 좋게 접시에 담아서 식탁에 올려두었다.

"창윤 씨, 우리 식탁에서 마실까요?"

"네."

나는 우리 둘의 집에서 그에게 처음으로 우리 집을 소개했다. 기분이 이상했고 묘하게 떨렸다.

"처, 음이죠? 창윤 씨 집이기도 한 이곳을 창윤 씨에게 이제야 소개한다니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맥주를 하나씩 들고 우리는 식탁의자에 마주 앉았고 어쩌면 처음으로 우리의 공간에서 고스란히 우리 둘만 있었다.

"그건 내가 제안했고 당연히 서은 씨가 가지고 누려야 하는 행복인걸요."

그의 한마디에 나는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모순된 감정의 서늘함은 평소보다 더 크게 다가와서 마음을 흔들었다. 자칫 내 마음이 더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까 봐 염려스러웠다.

"창윤 씨, 오늘 무슨 일 있어요? 갑작스럽기도 하고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라 걱정스럽기도 하고,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 궁금해서 그래요. 곤란한 이야기면 안 해도 돼요."

그 사람은 맥주를 들어 꿀꺽, 꿀꺽 천천히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맥주의 흐름이 언제쯤 끊어지나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 사람의 한 모금은 맥주캔이 텅 비어서야 비로소 멈추었다.

"목이 말랐나 봐요. 저, 맥주 한 캔 더 마셔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제껏 보았던 그 사람은 글쎄, 자신의 이야기보다 언제나 나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있었다.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사실은.. 예전에 제가 많이 좋아했던 사람에게 다녀오는 길이에요."

"아, 네. 그렇군요."

당황스러웠다. 그 사람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두려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떤 이야기에도 담담하게 들어주겠다고,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내 위태로운 감정의 선을 움켜잡을 수 있기를 스스로 바랐고 생각했다.

"그럼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그 사람은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미안해요. 서은 씨. 그 사람은 이 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오늘 그 사람이 있는 납골당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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