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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무난 유혐간택

by 정애

나는 흐린 날 커피 볶는 냄새를 좋아한다. 생두를 볶으면 처음엔 풋콩 냄새가 나다가 서서히 커피 향이 솔솔 풍기다가 살짝 탄내가 나기 시작하면 로스팅이 끝나는데, 오늘처럼 흐린 날은 커피 향이 하늘로 달아나지 않고 아래로 은근히 깔린다. 나는 안개처럼 깔린 커피 향 속에 머물며 사색하기를 즐겨한다. 생각을 비우고 눈을 감는다. 골치 아픈 잡념들이 커피 향에 녹아 사라진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내 동료들은 천지를 모르고 날뛴다. 멸치 대가리 몇 줌에 인생을 팔고 암컷 꼬리 짓 한 번에 혈투를 불사한다. 그네들을 불러 모아 계룡산에서 깨우친 불법 강의라도 한 번 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마음을 접었다. 이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고매한 석가의 진리를 설법한다한들 새발의 피만큼이나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그저 내 마음 다스리는 일에만 정진할 뿐이다.

나는 집도 절도 없는 땡중 같은 신세지만 가끔 기석이네에 들른다. 기석이 엄마는 저녁 반찬 하다 남은 멸치 대가리며 생선뼈를 뒷마당에 내놓는데, 덕분에 동네 길고양이들은 죄다 기석이네 뒷마당으로 매일같이 몰려든다. 나도 가끔 들리기는 하나 허기를 면할 정도 소식하는 편이다. 먹는 것에 연연해서는 절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섭생과 사욕에서 초탈한 삶,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진정한 삶이다. 대신 기석이네 옆집 카페 뒷마당에서 커피 볶는 향을 맡으며 명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몇몇 녀석들은 그런 내가 아니꼬운지 떼로 몰려와 온갖 질문을 쏟아내며 떠든다.

"거기서 왜 졸고 앉았소?"

“지난번 모임에는 왜 안 나왔소?”

“맨날 혼자서 심심하게 왜 그러는 게요?”

“그렇게 독불장군으로 살지 말고 좀 어울려봐요.”

“허구한 날 대체 뭐 하는 거요?”

“성격이 그따위니 친구가 없는 거라오!”

“그러려면 산에나 들어가시든가!”

이런 쓸데없는 말들을 들으면 한마디로 ‘피곤!’하다. 가끔 컨디션이 좋은 날은 그들의 질문에 적당히 답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못 들은 척하거나 “그래서 뭐요!” 하고 화를 낸다.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심하고 피곤한 족속들이다. 진심으로 나는 털끝만큼도 외롭지 않다. 외롭기는커녕 세상을 관찰하고 시대의 흐름을 분석하고 스승 석가의 말씀을 따르는 일로 바쁘기만 하다. 또 언제나 말썽 많은 이 동네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헤아려 주기에도 하루가 모자란다.

우선 카페 마담은 한동안 연애하느라 낯빛이 환하더니 요즘 다시 예전의 어두운 얼굴로 돌아갔다. 다크서클이 내려오다 못해 온 얼굴을 뒤덮은 듯 칙칙하다. 뻔하지! 무릇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건 실체가 없는 허상이요 허무니, 끝이 뻔한 이야기다. 게다가 상대 남자가 유부남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있나. 애초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을! 철없이 덤비다 큰코다친 꼴이다.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부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도를 깨달아 남자에 목매지 말고 혼자의 즐거움을 깨달아야 하거늘.

“안…...녕......야.....옹..…..아...!”

보통 사람보다 말이 세 배나 느린 카페 옆집 골초 아가씨는 담배를 입에 물고서 연신 하품을 한다. 뻔하지! 낮에는 저리 졸다가 한밤이 되어야 반짝반짝 눈을 빛내니 노상 햇빛 볼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우울 해질 테고. 밤엔 못 자고 낮엔 졸고 그래서 또 우울하여 커피만 홀짝이다가 밤엔 또 못 자고 낮엔 또 졸고. 일찍 일어나 햇빛도 쬐고 성한 두 다리 움직여 산책이라도 하다 보면 우울증이다 불면증이다 죄다 사라질 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라! 세상사 모든 일은 따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하나를 고치면 다른 것들은 줄줄이 해결되는 것을 어찌 모르고 저리 허송세월을 보내는지. 쯧쯧.

카페 단골인 빨강 머리는 심히 걱정이다. 가끔 참치캔을 사 와 기석이네 뒷마당을 동네고양이들의 격투장으로 만드는 장본인인데 처음엔 머리가 하도 짧아 남잔지 여잔지 구분도 안 가더니만 자세히 보니 피부가 뽀얗고 선이 고운 천생 여자였다. 무얼 그리 속을 꽁꽁 싸매 감추는지 행여 그 속은 이미 시커멓게 타 연기만 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인간은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존재라! 인간은 고통 속에 태어나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이니 불운일지라도 내 앞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그 나름의 소소한 기쁨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부디 알아차리길.

뒷집 정순 아줌마의 조현병은 하아! 정신병원에 들어가면 뭐 하나. 들어갔다 나오면 똑같은 것을. 온 동네사람에게 욕지기요, 그것에 댓구라도 할라치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는 통에 온 동네 사람들이 머리를 싸맨다. 게다가 잡동사니란 잡동사니를 죄다 앞마당에 모아두는 통에 길고양이들까지도 그 집을 피해 다닐 지경이다. 내가 늘 앉아 쉬는 담벼락에서 명상이라도 할라치면 돌을 던지고 내쫓는 통에 쫓겨나기 일쑤다. 스승 석가가 되살아오신다면 모를까 정순 아줌마는 답도 없다, 답도 없어.

아니, 저 빛나는 아우라! 귀를 간지럽히는 매혹적인 목소리! 은은하게 내 코를 자극하는 감미로운 향기! 내 몸을 간지럽히는 교태스런 몸짓! 그녀다! 앞집 테라스 난간에 올라앉아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사랑스런 마틸다! 나는 미친 파계승처럼 그녀를 향해 달린다. 오줌이 질금질금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 세상의 기준과 판단은 허상일 뿐. 진리는 어렵지 않다. 마틸다를 향해 내달리는 내 모습 또한 진정한 스승 석가의 가르침! 기다리시오, 마틸다. 어서 내 품에 안기시오, 마틸다, 나의 마틸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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