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니까요
얼마 전에 연구소 과제 리더 분과 면담을 가졌다.
용건은 업무 목표의 수정이었다. 과제 리더 분과 부서장님, 부서 담당 임원 분께서는 지원 팀, 전략 팀, 연구소장님, 사장님 등 유관 인물/부서와 지속적인 회의를 통해 주기적으로 과제 및 개인의 연간 목표를 수정한다. 새로운 목표가 수립되면, 과제 리더 분은 각 과제원과 개인 면담을 통해 수정된 업무 목표를 통보하며, 동시에 간략히 과제원과 만담을 나눈다.
우리 과제의 경우, 과제 리더 분께서 과제원들과 나이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와 친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시기에, 면담 중에 부담 없이 솔직한 생각을 토로할 수 있는 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비업무적인 내용으로 한 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다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업무에 대한 불만은 없냐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부분임을 알기에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라고.
첫 번째 불만인 '인프라(실험 장비) 부족'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예산 심의를 거쳐야 할 뿐만 아니라, 장비가 들어온다고 해도 애초에 물리적으로 놓을 자리가 없는 상황이다. 다음으로 '과제 방향성의 잦은 변경'에 대해서는, 우리 과제에 대한 연구소장님과 본사의 관심과 납기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과제 리더 분께서는 미안하면서도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입장이셨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과제의 성패가 개인평가와 직결되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속이 타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그때, 리더 분께서 예상치 못한 노하우를 전수해 주셨다.
어떤 회사, 어떤 직종이든 잦은 변화는 불가피하기에 중요한 건 나의 노력이라고.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남는 것은 나의 꿈틀거림 뿐이니,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된 것이라고.
과제 리더 분께서는 20년이 넘는 커리어를 지금의 대기업 그룹에서 쌓으셨지만, 그간에 계열사 이동은 잦으셨다고 한다. 입사부터 지금까지 쭉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제품 군을 개발해 오셨지만, 그 개발을 담당하는 계열사가 지속적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동안 제품 속의 각 주요 부품 개발을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맡아보셨으며, 팀도, 동료도, 사업장도 계속 옮겨 다니셨다고 한다. 한 번은 계열사 이동에 차질이 생겨 3개월 가까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의 커리어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점이, 자신이 한 업무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점이라고 하셨다. 수많은 변화를 겪으며, 별의별 업무를 보고, 다채로운 경험을 쌓았을 텐데,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노력을 들였고, 무슨 결과를 산출했는지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고 하셨다.
어찌 보면 변화가 잦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일 수 있지만, 그분 마음이 백분 이해가 갔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연차가 늘어나면, 명확한 형태를 가지는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그러면, 그 프로젝트의 성패에 따라 대략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되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나의 노력이 형태를 가진 채 남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노력에 이름이 붙여지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잊히게 된다.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무슨 노력을 들였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는 꾸준하고 주기적인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완벽한 반증이다. 그게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이다. 현재의 생각을 정리하고 가치관을 정립함에 더불어, 나중에 나의 어릴 적 생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최적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시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들인 노력은 분명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라는 집을 짓는 데 분명 어딘가 그 벽돌이 쓰였을 것이다. 그 벽돌이 어디에 들어갔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일 수 있지만, 틀림없이 그 벽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쌓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벽돌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게 좋든 나쁘든.
과제 리더 분도, 부서장님도, 부서 담당 임원 분도, 모두 천고의 시간을 거치며 수집한 수많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셨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사건을 하나하나 기억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 사건들은 구석구석 어디든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골조(骨組)라 하더라도 말이다.
"경험은 삶의 재료"라고 한다.
우리가 매 분, 매 초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지어질지를 좌우한다. 넓은 단층의 저택일 수도 있고, 가늘고 높은 마천루일 수도 있다. 투박하지만 튼튼한 건축물일 수도 있고, 아름답지만 위태로운 예술작품일 수도 있다. 어떤 재료를 마련할지 우리가 완벽히 좌우할 수는 없다. 살아가다 보면 원치 않는 경험과 사건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벽돌들을 어떻게 쌓아 올릴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결정할 수 있다.
우리의 꿈틀거림은 틀림없이 남아있을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보여줬던 꿈틀거림은 분명 어느새 우리의 일부가 되어있을 것이다. 설령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