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불빛이 켜지는 순간

봉숭아 빛

by 류서윤

퇴근길 차량들이 물결처럼 쏟아지는 시간.

잠시만 늦어도 정체에 갇힐 게 뻔한 길이었다.


평소 같으면 차선을 바꾸며 재빨리 빠져나가려 했겠지만
오늘은 주유등이 깜빡이며 내게 속삭인다.


‘조금만 천천히 가도 괜찮아.


지평선 가까이로 떨어지는 해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다도, 하늘도, 건물의 창도
한순간에 봉숭아 물든 손톱처럼 붉어졌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차를 세울 수 없었지만

그 붉은 공기라도 품고 싶어
창문을 살짝 내렸다.

차 안으로 스며든 노을의 향기.


문득 엄마가 봉숭아 꽃잎을 돌로 찧어
내 손톱 위에 조심스레 얹어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빨갛게 물들면 예쁜 사랑을 하게 된대.”


속도 제한도, 신호등도, 카메라도 없는 도로 위에서
‘초보 운전’ 스티커를 붙인 앞차가 천천히 달린다.
덕분에 나는 봉숭아 빛 노을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어둑해질 무렵
차들의 미등이 하나둘 켜지며 밤의 첫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누군가 어딘가에서 “하나, 둘, 셋!” 신호를 준 듯
가로등이 동시에 불을 밝힌다.


잘 정돈된 창원시의 도로가 반짝이며
나를 목적지로 이끌어준다.

세상은 지금

빛과 어둠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순간이었다.


낮의 끝자락과 밤의 시작이
잠시 섞이는 이 찰나에
모든 불빛이 살아 있는 듯 반짝인다.

그 불빛 사이로 나는

황홀한 붉은 길을 달린다.


세상의 모든 불빛이
내게 말하는 것만 같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우리는 언제든

너를 위해 반짝여줄 테니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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