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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불씨

by 낙화유수

관중석의 소음은 이제 단순한 웅성거림이 아니었다. 여러 언어가 부딪히며 동시에 튀어나오는 국제 합창 같았다. 일본어, 영어, 한국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가 스마트폰 스피커에서 쏟아졌다. 누군가는 얼굴을 가렸고, 다른 이는 화면을 켰다. 화면 속 한준의 얼굴은 실시간으로 확대되었다. “우연한 생존.” “조작된 참사.” 같은 영상이 도쿄에서는 수만 회, 뉴욕에서는 수십만 회 재생됐다. 브라질에선 “#HanJunSurvivor”가 트렌드 1위, 런던 방송은 ‘생존자=용의자’라는 문구를 띄웠다. 그는 고개를 숙였으나 아니,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으나, 전 세계의 눈은 이미 그를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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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 불신의 확산

기자석은 전쟁터였다. 협회 직원이 “영상은 삭제해야 한다!”라며 카메라를 낚아채려 했다. 젊은 기자는 메모리 카드를 빼내 호주머니로 밀어 넣었지만, 팔이 부딪히며 카드는 객석 밑으로 굴렀다. 작은 사각형은 빛에 반짝이며 아이 발끝에 멈췄다. 아이가 그것을 집자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협회 직원이 손을 뻗었고,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보안관이 몸을 날려 제지했지만, 카드는 다시 공중을 돌아 다른 기자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그 기자도 잠시 멈칫했다. 무엇을 쥔 건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순간 판단이 흐려졌던 것이다. 카드는 잠시 후 다시 바닥을 구르며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플래시가 연속적으로 터졌고, 각 카메라는 서로 다른 ‘진실’을 기록했다.


같은 순간, 다른 곳에서 라울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외 도박판에 중계가 송출되고 있었고, 채팅창은 다국적 언어로 가득 찼다. “1.3배에 한준 아웃.”, “2.0배에 경기 무효.” 숫자는 요동쳤다. 환희와 조롱 그리고 냉소가 뒤섞인 글들이 쏟아졌다. 라울은 배당률을 조정하며 화면을 지배했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담배도 입술에 걸친 채였다. 그는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니었다. 그는 판돈을 키우는 딜러이자 주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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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2: 기록과 도박

리사는 심판석에서 주머니 속 USB를 쥐고 있었다. 회의록, 무전, 계약서 사본이 담겨 있었다. 순간, 과거가 겹쳐졌다. 몇 해 전, 또 다른 폭발. 그때도 기록은 있었지만,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몇 명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때 난 공범이었다.’ USB는 종이보다 작지만 훨씬 무거웠다.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번만은…” — 그러나 끝내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옆에서 들려온 무전 소리가 그녀의 목을 끊은 듯 멈추게 했다. “영상 삭제, 연방 보고 차단.”


한준은 무대 끝에 서 있었다. 숨은 목까지 차올랐지만, 폐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귀에는 관중의 웅성거림 대신 전자음 같은 진동만 울렸다. 내려가야 할지, 올라서야 할지—그 선택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그 순간 눈앞이 흔들리며 환영이 겹쳤다. 웃으며 루어를 던지던 자신의 모습, 폭발 직전 눈을 마주쳤던 동료의 얼굴. 그 얼굴은 물속으로 빠져드는 듯 사라졌다. 드론 불빛이 바로 그 자리를 덮었고, 환영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손을 뻗었으나, 무엇을 향해였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드론은 이제 단순 촬영이 아니었다. 얼굴 인식 프로그램이 군중 위로 붉은 원을 던졌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으나 이미 늦었다. 서울의 알림에는 “용의자 발견”이 떴고, 런던 방송은 “생존자가 배후”라 했다. 카페, 병원, 지하철 스크린 속에서 세계가 동시에 같은 장면을 보았다. 누군가는 손뼉을 쳤고, 누군가는 욕을 내뱉었다.

찰스 협회장은 무전기를 움켜쥔 채 명령을 쏟아냈다. “증거 확보, 기자 체포, 영상 삭제.” 그러나 보안관의 대답은 짧았다. “명령 취소. 증거는 우리가 관리한다. 증인은 격리한다.” 그 목소리는 무겁고 흔들림이 없었다. 찰스의 손이 떨렸고, 몇 초간—아니, 어쩌면 몇 분간—무전기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보안관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확성기 없이 목소리를 터뜨렸다. “이 현장은 봉쇄되고! 모든 기록물은 수거됩니다! 증인은 별도 보호된다! 협회 인력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시길!” 그의 말은 단순한 경기 중단이 아니었다. 법과 질서가 직접 개입한 선언이었다. 경찰 방패가 객석 사이로 들어섰고, 드론 불빛이 얼굴을 훑었다. 군중은 두 갈래로 쪼개졌다. 일부는 휴대폰을 높이 들어 갈채를 보냈고, 다른 이들은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한 여자의 울음은 박수 소리와 겹쳐 이상한 화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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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3: 갈라진 군중

한준은 발끝에서 힘을 잃었다.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었다. 모든 눈과 카메라가 그를 겨누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아니, 생존자라는 말 자체가 부당했다. 그는 세계가 요구하는 증인이자, 다가올 폭풍의 문을 열어젖힐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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