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은 폭발이 멎었음에도 여전히 흔들렸다. 철이 타버린 냄새가 목구멍을 찔렀고, 먼지는 공기 속에 흩날려 빛을 잡았다. 관중은 앉아 있었으나, 마음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 휴대폰 화면 수십 개가 하늘로 치켜들리며 현실 대신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었다. 같은 장면이지만 각국의 언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덧칠했다. 뉴욕에서는 “용의자”, 도쿄에서는 “증인”, 리우에서는 “생존자=배신자.” 한준의 실루엣은 이제 개인이 아니라 세계의 틀 속에 가두어진 아이콘이었다.
이미지 1: 봉쇄와 분열
“출구 봉쇄! 기록물은 지정 테이블로!” 보안관의 목소리는 쇳소리 같았다. 방패가 일제히 들어서며 통로가 벽으로 변했다. 조명이 반사되어 번쩍일 때마다 군중의 숨결은 얕아졌다.
리사는 심판석에 몸을 굳혔다. 손바닥 안 USB는 종이보다 작았으나 규정집 수십 권보다 무거웠다. 땀이 흘러내려 금속 표면에 맺히자, 조명 불빛은 그것을 불씨처럼 번쩍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기억이 덮쳤다. 몇 해 전, 또 다른 폭발. 기록은 있었으나 봉인되었다. 이름과 얼굴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 선택은 곧 공범이었다.
“이번만은 숨지 않는다.”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무전기의 잡음이 결심을 삼켰다. “삭제. 차단. 금지.” 반복되는 단어가 벽이 되어 그녀의 폐를 막았다.
한준은 계단 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귀에는 전자음 같은 진동이 울렸고, 눈앞에는 파편 같은 환영이 겹쳤다. 폭발 직전 동료의 얼굴, 물속으로 가라앉는 그림자.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으나, 손바닥 뒤로 수백 개의 시선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왜 나만 살아남았지? 아니, 내가 살아남은 게 맞긴 한 걸까?’ 혼란이 심장을 조였다.
그때 객석 쪽에서 함성이 터졌다. “에단이다!” 군중이 술렁였다. 생존자 중 한 명, 지역 주지사의 아들 에단 콜린스가 보안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얼굴에 피가 묻었으나 옷은 깨끗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속적으로 터졌다. 누군가는 외쳤다. “정치적 특혜다!” 시선은 순간 리사에게서 벗어나 에단에게 몰렸다.
멀찍이, 또 다른 생존자가 흔들리는 걸음으로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팔에 새겨진 문신이 조명을 받아 드러났다. 예전 멕시코 카르텔 중간보스로 활약하다가 갑자기 배스 프로 선수로 전향한 라파엘 모레노! 이번 참가도 멕시코 카르텔 대표 선수라는 의혹의 중심에 있었지만, 아무런 증거나 추측만이 난무하는 상태였다. 이를 하이네나 처럼 알고 있던 일부 기자들이 동시에 셔터를 눌렀다. SNS에는 곧 #CartelPlayer 해시태그가 폭발했다. “이 경기는 쇼가 아니라 세탁장이었어!”라는 자막이 화면을 뒤덮었다. 검증되지 않은 보도가 각 언론사의 시청률을 높였고 이를 전하는 기자들은 승진의 기회나 인센티브를 요구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특히 프리랜서라면 언론사에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부르는 것이 값이 되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액수의 기회였다.
라울은 난간 끝에 앉아 있었다. 그의 휴대폰 화면은 파도처럼 요동쳤다. 붉은 그래프가 가파르게 솟구쳤다가 푸른 선이 곤두박질쳤다. “USB 확보 1.7배, 한준 체포 2.3배, 협회 우위 2.5배, 에단 생존 1.9배, 라파엘 배신 3.2배.” 항목은 늘어나고 있었다. 배당판은 이제 단순한 경기 결과가 아니라 권력의 흐름과 범죄의 그림자를 동시에 반영하고 있었다.
이미지 2: 조작되는 배당률
라울의 손끝이 작게 움직였다. 그래프가 즉시 요동쳤다. 채팅창에는 다국적 언어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에단 보호=부패”, “Cartel Player Betrayal!”, “USB is the bomb”. 언어는 달랐지만 분노와 조롱, 환희가 섞여 하나의 소음이 되었다. 라울은 담배를 물고 중얼거렸다. “이건 경기장이 아니라 시장이다. 목숨도, 거짓도, 정의도 다 팔린다.”
심판석에서는 여전히 싸움이 벌어졌다. 한쪽은 “USB는 협회 관할이다”라고 외쳤고, 다른 쪽은 “공권력이 개입해야 한다”라고 맞받았다. 두 사람의 몸이 부딪히며 펜과 서류가 바닥에 흩날렸다. 기자들이 달려들어 플래시를 터뜨렸다. 어느새 심판들조차 군중의 시선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리사는 숨을 고르려 했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눈앞의 혼돈 속에서 한 가지 확신만 잡고 있었다. ‘이번에도 눈을 감으면 나는 다시 공범이 된다.’ USB는 그녀의 살을 파고들 듯 무거웠다.
한준은 계단 끝에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귀에는 군중의 외침이 파도처럼 겹쳤다. 어떤 순간엔 자신에게 모든 시선이 꽂히는 듯했고, 다른 순간엔 자신은 단순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 같았다. 혼란과 자책이 뒤엉켰다.
에단은 보안관 두 명의 어깨에 지탱된 채 서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에게 몰린 카메라 플래시는 달랐다. “주지사 아들 보호, 특혜 의혹”이라는 자막이 이미 스크린에 번쩍였다. 군중은 환호와 야유로 갈라졌다.
라파엘은 고개를 들며 군중을 노려보았다. 그의 팔의 문신은 분명 카르텔의 표식이었다. 기자들이 이를 클로즈업했고, 곧바로 네트워크에 흘러갔다. “이 경기는 쇼가 아니라 카르텔의 무대였다.” 해시태그가 도배되었다. 군중의 분노는 다시 분산되었다.
라울은 화면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군중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몰리지 않았다. 정치, 범죄, 증거, 생존—모든 축이 동시에 거래되고 있었다.
리사는 난간 끝에 서 있었다. 손바닥 위의 USB는 작은 불씨 같았다. 땀으로 미끄러운 금속 표면이 조명에 반사되어 불꽃처럼 번쩍였다.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는 눈을 감았다. 기록은 봉인됐고, 이름은 사라졌다. —아니, 도망쳤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눈을 감는다면, 그녀는 다시 공범이 될 것이다.
보안관이 앞으로 다가왔다. 협회 직원은 반대편에서 손을 뻗었다. 두 손길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리사의 눈동자는 흔들렸지만 손아귀는 더 단단해졌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목소리는 작았으나 수십 개의 드론과 마이크가 동시에 잡았다. 자막은 즉시 번역돼 스크린을 뒤덮었다. I will not be silent. No guardaré silencio. Je ne resterai pas silencieuse.
이미지 3: 증인의 고립
한준은 계단 끝에 있었다. 드론의 붉은빛이 몸을 포위했고, 그림자는 잘려나갔다. 귀에는 전자음 같은 진동이 울렸고, 눈앞에는 폭발 직전 동료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으나, 손바닥 뒤로 수천의 시선이 파고드는 듯했다. ‘나는 왜 살아남았나? —아니, 나는 살아남은 게 아니라 남겨진 건가?’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다.
군중은 분열됐다. 일부는 울부짖으며 “그녀를 지켜라!”를 외쳤고, 또 다른 일부는 손가락질하며 “잡아라!”라고 고함쳤다. 휴대폰마다 다른 언어 자막이 번쩍였다. 기자들은 펜을 꾹꾹 눌러 기록했으나 눈빛에는 불안이 번졌다.
에단 콜린스는 보안관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주지사 아들 보호 특혜”라는 자막이 스크린에 번쩍였다. 군중은 환호와 야유로 갈라졌다.
라파엘 모레노는 팔의 문신을 드러낸 채 군중을 노려보았다. 기자들의 카메라는 그의 문신을 확대했고, 곧바로 해시태그가 퍼졌다. #CartelPlayer, #GameOfBlood. 군중은 정치와 범죄, 협회의 은폐, 그리고 진실의 불씨 사이에서 갈라졌다.
한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더 이상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은 곧 자기부정으로 이어졌다. 아니, 그는 열쇠였다. 축복이 아니라 낙인이었지만, 동시에 진실을 여는 열쇠였다.
경기장은 잠시 숨을 죽였다. 환호도, 울음도, 명령도 멎었다. 정적 속에서 스크린은 한 장면을 고정했다. 리사의 손에 쥔 USB, 계단 끝의 한준, 그리고 곁에 서 있는 에단과 라파엘. 네 개의 초점이 한 화면에 묶였다.
세계는 그 장면을 동시에 저장했다. 아직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미 불씨는 옮겨 붙었다. 고요는 잠시였다. 그 뒤에는 더 큰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