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현실보다 소설 앞에서 더 솔직해지는가
저에게는 마흔을 훌쩍 넘긴 화교 '딸'이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캐나다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고 있지요. 대학 시절의 잘못된 선택을 계기로, 제 삶의 방향을 평생 굳히게 한 딸 같은 제자입니다. 비록 그녀가 목에 남은 한 가닥의 상처를 드러내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오히려 누군가의 그 상처를 지워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늘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내 마음을 볼 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어.”
그러고 보니, 저는 정말 평생을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삶을 살고 있군요.
그런데 글을 쓰며 작가라는 위치에서 독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보면, 참 흥미로운 장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용기 내어 고백하는 이에게는 침묵하던 이들이, 가상의 이야기에 더 쉽게 눈물을 흘리는... 이 흥미로운 역설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이것은 어느새 누군가의 질문이 되어, 제 앞에 하나의 과제로 놓이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 누군가가 아주 솔직하게, 정말 용기를 내어 마음의 문을 열 때, 정작 듣는 쪽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며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덤덤함’이라는 단어가 꼭 그 공백을 차지하죠. 마치 그 순간, ‘냉정하게 마음을 준비해야지’ 하는 자세입니다. 이야기를 꺼내는 이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비통함을 전하지만, 듣는 이의 마음은 왠지 상대가 연 문만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공감이라는 감정을 오직 자신의 경험 속에서만 찾으려 할 뿐, 겉모습은 아주 평온하기만 합니다.
“이성이 감정을 억누르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도 않죠. 우린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상황을 바꾸어보면, 한 권의 책 속에 담긴 가상의 소설이나 상상의 서사 앞에서는 사람들은 더 쉽게 울고, 더 진하게 공감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비통에 잠기기도 하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야기 속 감정이 어디로 흐르느냐에 따라 우리는 함께 분노하고, 또 함께 슬퍼하며 아파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왜 현실의 고백에는 이성적이면서 소설 속 이야기에는 감정을 흘려보내는 이 기묘한 대비를 보이는 걸까요? 그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요?
‘현실의 감정은 책임을 요구하고, 소설의 감정은 경험만을 선물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현실에서 “나 요즘 정말 힘들어”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즉시 정서적 책임을 떠올립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진심으로 들어줘야 하나? 위로도 해줘야 하나?”
결국 자신을 향한 이 모든 질문은 곧 부담이 됩니다. 하지만 만일 자신에게 동일한 경험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당장 자신을 상대방의 입장에 두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상대의 사정을 듣는 만큼, 자신의 책임이라는 몫의 무게를 저울질하게 되는 셈입니다.
반면 소설 속 인물이 “나 힘들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저 읽기만 하면 됩니다. 전화를 걸어 위로할 필요도, 해결책을 제시할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감정은 흐르지만, 그 감정은 나에게 아무런 의무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설 속 감정은 가볍고 부드러우며, 오롯이 타인의 경험으로만 머무릅니다.
이 차이는 아주 단순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현실의 감정은 행동과 관계를 요청하지만, 가상의 감정은 내면의 경험을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담 없는 감정 앞에서 인간의 공감 능력은 가장 크게 열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독서의 순간마다 잊지 않고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현실에서는 상대의 눈을 보지만, 소설에서는 내 속을 보기 때문입니다.’
현실 대화는 늘 상대의 눈과 표정을 포함합니다. 그 사람이 표정을 굳히면 우리는 즉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까?” 하며 작은 긴장이 마음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이 긴장은 공감의 회로를 빠르게 차단하고, 이성적으로 저울을 끄집어내게 만듭니다.
하지만 소설에는 눈동자도, 표정도, 눈치도 없습니다. 그저 글자와 내 마음만이 남습니다. 이야기 속 흐름을 따라 나 역시 그 감정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됩니다. 인물은 나를 평가하지 않고, 내 반응에 실망하지도 않으며, 나의 감정적 실험을 마음껏 허락합니다.
사람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자리에서 더 솔직해지고, 더 따뜻해진다는 심리학적 원리를 소설은 가장 안정적으로 구현합니다. 소설은 상대의 시선이라는 압박 없이, 독자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게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는 ‘안전지대(Safe Zone)’인 셈입니다.
‘심리적 거리는 공감과 자기 확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고통은 너무 생생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 해도, 그 구체성 때문에 나의 상처를 직접 건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즉각적인 방어를 일으키고 반응을 최소화하려 합니다. 다시는 아프고 싶지 않은 상처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때로 되돌아가는 감정이 두렵기도 하기 때문이죠.
반면 소설 속 감정은 한 걸음 떨어져 있습니다. 내 경험과 닿아 있어도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독자는 이야기의 시작과 흐름, 심지어는 결말까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적당한 심리적 거리(Psychological Distance)가 공감을 가능하게 합니다. 너무 가까우면 방어하고, 조금 멀리 있어야 비로소 이해가 싹틉니다. 공감은 역설적으로 안전한 거리에서 가장 잘 자라는 감정입니다.
이 거리는 독자가 부담 없이 자기 확대(Self-expansion)를 경험하게 합니다. 가상의 인물과의 간접적 경험을 통해, 내 자아에 새로운 감정과 사고방식을 통합하며 내면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설이 전해 준 새로운 감정에 자신을 투사합니다. 슬픔은 오히려 내 것이 되고, 분노는 과거와 현실을 다시 깨웁니다.
‘소설은 정돈된 감정을 제공하며 카타르시스를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감정은 언제나 덜컹거립니다. 맥락도 불명확하고, 해결도 없는 채로 툭 떨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 감정은 구조를 가집니다. 서사와 갈등, 흐름과 매듭이 존재합니다. 이 정돈된 감정은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지 못한 ‘이해 가능성’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설 속 인물에게 깊이 공감합니다. 사실은 그 인물을 통해 정리되지 않은 자신의 감정을 함께 정돈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독자는 격렬한 감정을 안전하게 경험하고 해소하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낍니다. 현실의 감정은 정화 없이 고통으로 남지만, 가상의 감정은 정화의 과정을 거쳐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진솔함은 독자의 거울이 되어, 투사(Projection)의 역설을 이룹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역설이 생깁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글무리 작가는 이런저런 구체화된 심리적 ‘때문입니다’를 나열했습니다. 이는 독자는 작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더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누군가 마음을 열면 묘할 만큼 조용해지며 감정을 최소화합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끝없이 진솔함을 요구합니다.
“당신의 속내를 더 보여 주세요.”
이 모순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감정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현실의 진솔함은 관계를 깊게 만들고 부담을 키우지만, 작가의 진솔함은 관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읽고 지나가면 그만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 감정을 최대한 구조화하고 극대화해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결국 사람들은 작가의 감정에 자신의 미해결 된 감정 문제를 투사하여 안전하게 다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고백은 독자의 마음에 도착하면 거울이자 스크린이 됩니다. 작가의 감정을 읽으며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돈하고자 하는 선한 바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힘겨운 시대, 글은 또 하나의 안전지대가 됩니다.
사람들은 감정을 ‘관계’가 아닌 ‘이야기’라는 통로로 흘립니다. 이제는 말라 버려 짐만 될 뿐인 낙엽이 개울에 떨어져, 자연스럽게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작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삶 속에 억눌려 있던 고통과 비애를 글이라는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란, 그 모순의 한가운데에서 독자에게 감정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독자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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