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향한 거북이의 질주 - 8화

거북이를 위한 소나타

by 달빛기차

※ 이 이야기는 성인 독자를 위해 재해석된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두근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북아!! 괜찮아? 너 지금 식은 땀나!”

"윽"
순간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분홍 토끼가 뭐라고 하는 듯했지만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구나란 생각만 들었다. 그 순간 묻지 못한 100통의 편지가 생각났다.


독창적. 의인화. 거북이가 병원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거북이(여자)는 환자복을 입고 링거를 맞고 있다. 옆에 핸섬한 분홍토끼(남자)가 겨울 코트를 입고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앉아있다. 3D..jpg @Canva생성

“괜찮아?”

“휴-우”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분홍 토끼였다. 살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야! 내 간 지켜준다더니 네가 먼저 갈려고 하면 어떻게 해. 그래서 내가 쉬엄쉼엄하랬지?”

토끼는 손에서 간을 꺼내 주었다. 신입사원 때 나를 물 먹인 프로젝트 애완간이었다. 애완간은 실제 간은 아니고, 영양제였다.

“고맙다.”

“고마우면 이제 좀 나 좀 봐주라.”


분홍 토끼는 처음으로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화라는 표현보다는 나한테 당근이라도 빼앗긴 표정이었다.

“편지한다더니 연락 한 번 안 하고, 20년 만에 겨우 다시 만났나 했더니 아는 채도 안 하고. 나 너한테 뭐 잘못했냐?”

“무슨 소리야? 100번이나 했는데 답장 안 한 건 너잖아, 켁케”

분홍 토끼의 황당한 소리에, 이번에는 내가 화가 나서 상추라도 집어던질 듯 소리쳤다. 너무 급히 소리치다 보니 사례까지 걸렸다.

“괜찮아?”

“휴-우, 괜찮아. 그런데 무슨 소리야. 편지를 못 받았다니?”

“편지 온 적 없어.”

“너 이사 가자마자 국제 학교 기숙사 들어갔다고 해서, 몇 번이나 편지 보냈는데”


“엥?? 아!!! 그거 나 아닌데. 우리 형이야.”


그러고 보니 토끼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다. 엄청 성실한데, 엉뚱한 형이.

“하-“

“으악!!!!!!!!!!!!!! 이 초록색 토끼XX!!”

그렇다 분홍 토끼 형은 초록색 털이다. 뭔 총천연색 집안도 아니고.

분홍 토끼는 그라데이션으로 분노가 올라오는 듯 보였다. 신음으로 시작하더니, 비명 그다음에 욕설. 충분히 그럴 만하기에 아무 말하지 않았다.

‘우리 말랑푸딩 분홍 토끼 어른이었구나.’


“뭐야 그럼 우리 서로 오해한 거야?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날 그렇게 무시했어?”

“무시라니? 내가 언제 흠흠..”

말랑푸딩 분홍 토끼는 게슴츠레하게 날 바라봤지만 무시했다.

“너 국제 학교 들어간 게 아니야?”

“내가? 그럴 리가. 그 재미없는 데를 왜가. 공부만 해야 하는데. 난 사방을 뛰어다녀야 하는 토끼야! 몰라?”

거북이는 어린 날의 토끼가 떠올랐다. 여린 성격과 다르게, 호기심이 왕성해서 온 동네 산을 뛰어다녔다. 그때 웃던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온몸이 더러워진 채로 나타나도 사람들은 귀여움에 야단을 치지 못했다. 아무런 계산 없이 순수하던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케팅에서도 그런 호기심이 많은 도움이 됐다. 덕분에 승승장구했고.


“맞다. 넌 그랬지.”

“그런데 그럼 그것 때문에 그렇게 날 멀리한 거야?”

“... 뭐 그렇지…”

“으아아아!!!! 아까운 짓 했네! 진작 알았으면 이렇게 늦지 않았잖아.”

분홍 토끼는 두 귀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뭐가?”

“뭐긴 뭐야!! 고백이지. 거북아! 나랑 사귀자! 좋아한다!”

분홍 토끼는 갑작스럽게 한쪽무릎을 꿇고 고백을 했다. 손엔 아무것도 없이.

“뭐?”

“너 약속 기억 안 나? 네가 내 간 지켜준다며. 그거 토끼계에서는 청혼이잖아!”

거북이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나 이번에 너 잃는 줄 알고 너무 놀랐어. 내가 살아 돌아오니 이제 네가 쓰러지냐?”
“그게 무슨 소리야?”


알고 봤더니 분홍 토끼의 안식년은 암을 치료하기 위한 기간이었다고 한다. 그날, 해장하자고 한날 수술을 위해 출국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전화기는 한국에 두고 갔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고. 모든 것이 오해였다. 한마디만 물어보면 될 것을 오해로 너무 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너 쓰러지고 오소리 선배도 그렇게 돼서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 줄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오소리 선배가 그렇게 됐다니?”
“아…”

녀석의 당황한 얼굴이 불안을 키웠다.
“빨리 말해!”

분홍 토끼는 망설이는 듯 우물쭈물했다. 이렇게 보니 말랑푸딩 토끼가 맞았다. 나는 다그치기를 그만두고 부드럽게 다시 물었다.

“나 괜찮으니까, 말해. 빨.리.”

“어제 돌아가셨어. 너 쓰러지고 바로 병원에 와서 치료받는 사이에 오소리 선배도 쓰러졌다고 하더라. 뇌출혈이었어. 너랑 오소리 선배가 우리 회사에서 제일 야근이 많았잖아. 과로였나 봐. 그래서…”

분홍토끼는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눈이 빨갰다. 원래 토끼가 눈이 빨갛지만 더 빨개져 있었다.

“너도 잘 못 되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웠다.”


말을 마치고 고개를 떨구는 녀석의 손을 지긋이 잡았다. 내 손이 잘게 떨려왔다. 오소리 선배가 죽다니. 등딱지가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었다. 닌자 학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등딱지를 떼어버리고 싶었다. 쓸모없이 무겁기만 한 등딱지가, 도움이 되지 않는 그것이 나 같아서.

하지만 그런 감정에 젖어 있기에는 분홍 토끼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켜준다고 했는데, 울리기만 했네. 미안.”

울컥 감정이 올라왔는지, 녀석은 나를 끌어안았다. 불편하게. 그리고 어깨가 축축해졌다.

“우리 말랑푸딩 토끼는 아직도 말랑말랑했네. 이렇게 말랑해서 어떻게 차장까지 됐데.”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녀석이 진정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례식장 어디야?”

“이 병원이야.”

“가자”


오소리 선배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믿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웃던 선배의 얼굴이 영정 안에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다. 만약 분홍 토끼가 내 곁에 없었다면, 빠른 응급조치가 없었다면 나도, 내 심장도 멈췄을 것이다. 오소리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두려웠다.


“선배 저 왔어요.”

영정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왔어?’

선배가 웃으며 반겨주는 느낌이 들었다.

‘적당히 해, 적당히. 나처럼 일 중독에 빠지면 안 된다.’

선배의 입버릇이었다.

‘난 꼭 임원이 되고 싶어. 돌아보니 그것만 내 목표로 남았더라. 그리고 이 정도 회사에 봉사했음 줘도 되지 않겠어? 호호호’

그래도 됐다. 선배는 그 이상으로 일했으니까. 가족을 위해 시작한 일에 매몰되어서, 일만을 위해서 산다고 하셨던가? 자신을 닮지 말라고 늘 말했던 선배의 말이 아리게 가슴을 지나갔다.

“감사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아도 선배는 알아줄 것 같았다. 다만, 아무리 해도 부족한 말을 전했다. 진작 전했어야 했는데.

“감사했어요. 선배.”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힘들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존재였다. 1등을 해야 하는, 1등에 집착하는 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거북이로 봐준 사람. 1등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 준 사람. 그 사람을 방금 잃었다. 나는 옆에 서있는 분홍 토끼의 손을 잡았다. 녀석은 놀란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고는 쑥스러운 듯 빨개졌다.

‘장소 좀 가려서 빨개져, 앞으로 계속 이러면 같이 못 다닌다.’

속으로 눈물이 쏙 들어갈 만한 웃긴 상상을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편(마지막)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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