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향한 거북이의 질주 - 9화(완결)

에필로그

by 달빛기차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안식년에 들어갔다. 당시 쓰러진 원인이 심근경색이었고, 스텐트 시술을 받은 상황이라 건강 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접고 한라산으로 내려갔다. 분홍 토끼는 따라오겠다고 난리였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때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1년 후 회사를 그만뒀다.

안식년 끝에서 복직을 고민하긴 했지만, 오소리 선배가 떠난 그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똑같이 돌아가는 회사 안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을 늦게라도 시작하기로 했다.


[닌자 출판사]


어릴 적 분홍이를 지키겠다고, 닌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닌자 학교 입학시험까지 봤었다. 등딱지가 고르지 못하고 경도가 말랑하다며 떨어졌지만. 그 이후였던 것 같다. 자존감이 낮아지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생각 없는 아버지의 침묵을 마음대로 해석했던 것도. .


자신 있게 시작한 일이 어그러졌을 때 버틸 용기가, 힘이 그때는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나무처럼 늘 한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지만, 난 다가와 주시길 바랐다. 오지 않는 것이 내가 부끄러워서라고 믿었다. 내 부끄러움을 아버지 몫으로 넘긴 거였다.

내가 쓰러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나무뿌리를 잘라내고 내게로 달려오셨다. 그리고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독창적. 의인화. 건물에 간판을 달고 있다. 거북이 여성이 간판을 다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본다. 그 옆에 핸썸하고 늘씬한 분홍색 토끼가 거북이를 행복하게 바라본다. 옆에는 또 닌자거북이 차림을 한 거북이와 육상복을 입은 검은색 날렵한 토끼가 서있다. 3D..jpg

“자기야~ 우리 회사 너무 멋지지 않아?”

간판을 다는 모습을 보고 분홍이는 행복한 듯 나를 끌어안았다. 아 쫌! 아무 데서나 안지 말라니까 참 말 안 듣는 말랑푸딩이다.

내가 회사를 차린다고 하자, 분홍이는 사표를 던지고 바로 한라산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혼자보다는 둘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사장, 녀석이 부장. 우리는 더 격차가 벌어졌다. 썩 마음에 드는 관계라 수락했다. 직원은 아직 우리 둘 뿐이고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잘하기보다는 우리가 즐거운 일을 하기로 했다.


“자기야~ 우리 이제 부자 되는 거지?”

말랑푸딩 분홍 토끼는 이제 내 앞에서는 예전처럼 완전 말랑말랑해졌다. 그동안 어떻게 그리 쿨한 척했는지. 나한테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였다고 하는데, 난 귀여운 것이 더 좋은 거북이다. 매일 말 없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내가 그런 남자를 좋아하겠냐고?

“아가, 한라산으로 내려오니 좋지? 역시 한라산이 최고라니까.”

“하하하하, 아버님 눈이 너무 쌓여서 저한테는 힘들어요.”

여전히 한라산에서 검은 귀를 휘날리며 후학을 양성하고 계신 검은 토끼 아버님은 우리의 연애를 두 손 들고 환영하셨다. 그 소식을 듣고 한라산을 7바퀴 돌면서 결혼까지 하고 애 낳고 잘 살게 해달라고 산신님께 기도드렸다고 했다. 내가 산신님이면 시끄러워서 오히려 방해할 것 같지만. 어찌 됐던 에너지 넘치시면 좋은 거다.

참고로 청혼에 대한 답을 아직 하지 않았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30년을 먼저 채우고 싶었다.


“그런데 자기 친구, 사막 여우씨는 같이 일하겠데??? 꼭 필요하다며”

“응 지금 설득 중이야. 녀석만큼 기획력이 뛰어난 인제가 없어”

만년 1등인 사막 여우는 대기업에서 인정받는 전략기획팀장으로 일하다가 결혼하고 경력단절이 됐다. 다시 일은 하고 싶은데, 단절된 경력으로 일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침 우리 회사에 기획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해서, 저임금 고인력을 지금 노려보는 중이다. 녀석이 우리 회사로 오면 난 이제 모두 이겨보는 것이다.


“자기 지금 좀 사악한 생각 중이지?”

“무슨… 그럴 리가.”
“그럼 우리 아가가 사악이라니, 너 나가”


검은 토끼 아버님은 우리가 사귀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무조건 내 편이 돼주셨다. 그리고 아주버님은…. 아버님께 반 죽었다. 내 편지를 받고도 전달하지 않은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진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지. 처음에는 팬레터라고 생각해서 뜯어보지도 않고 방구석에 처박아뒀다고 한다. 내 이름을 몰랐다나? 내가 분명 분홍 토끼 앞이라고 써서 보냈는데 말이다. 원래도 나사 하나 풀린 사람이기 했는데, 알고 보니 10개의 나사 중 1개만 정상인 토끼였다. 팬레터라니… 그럴 리가

이 이야기를 들은 두 남자는 아주버님을 … 이하 생략이다.


“그런데 코치님은 이번에는 태평양으로 가신 건가? 언제 오신다고 하시든”

“할아버지는 이번에 태평양에 태어난 거북이들 중에 훌륭한 선수를 발견하셨나 봐요. 한 십 년은 안 돌아오실 것 같으세요.”

거북이 수명이란… 그러고 보면 말랑푸딩이 오래 살아야 할 텐데. 영양제를 잘 조제해서 녀석의 건강을 챙겨줄 생각이다. 안 그래도 암을 한번 앓았기 때문에 더욱 무리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 줘야 한다.


“그나저나 아가야. 그래서 우리는 언제 식구가 되니?”
“하하하, 아버님. 저희 이미 식구 아니었나요? 30년 전부터”

“하하하 그렇지. 역시 우리 아가구나”

“아니 아버지 내 아내지”

“아직 아내는 아니지”


나는 말랑푸딩 분홍 토끼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웃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예전처럼 고개만 끄덕이셨다. 과묵한 아버지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이제야 인생을 사는 느낌이다.


<끝>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