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Burgo Ranero → Mansilla de las Mulas
오늘은 별로 쓸 말이 없다. 그동안 같이 걷기도 하고 알베르게에서 익숙하던 얼굴들이 모두 앞서 가버리고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새 얼굴들만 보이니 정말 ‘외국’에 온 것 같다.
오늘의 알베르게에는 주방도 없고 전자레인지도 없고, 익숙한 친구들도 없고 도미토리 안의 사람들 매너도 없다. 도미토리 안에서 계속 시끄럽게 수다를 떤다. 까미노길을 걷다 보면 체력이 약한 사람은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바로 잠을 청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그래서 어느 알베르게에서도 도미토리 안에서는 휴식을 취하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조용조용 다녀야 한다. 그런데 내 옆으로 침대 하나 너머의 자리를 잡은 동양인 외모지만 프랑스어를 하는 할머니 한 분은 오랜만에 동향분을 만났는지 한 명은 이층 침대 위에서, 다른 한 명은 그 침대 기둥을 잡고 서서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풍 수다를 떠신다. 금방 끝날 것 같은 분위기로 20분이 넘게 (내 느낌은 30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지만, 내 뇌가 나의 이런 기분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내 기억을 과장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20분으로 조정해서 적는다. 아무튼 무지무지하게 길게) 대화를 하고 있다. 인내심도 없고 용기도 없는 나는 내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자 그나마 조금 있는 용기를 모아 모아서 조용히 좀 해달라고 한마디 한다. 드디어 좀 조용해지는 듯하더니 곧바로 다른 사람이 바통을 이어서 또 계속 쉴 새 없이 떠든다. 포기한다.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저렇지 않았는데…. 같이 있었다면 그 친구들도 조용히 좀 하라고 한 마디씩 보탰을 텐데…. 다행히 오늘 우리는 도미토리 제일 구석의 창문 바로 옆 자리 침대를 차지했다. 내 이층 침대에 올라가 누우니 창밖으로 노을을 잘 보인다. 빨~~갛고 노~~랗고, 구름은 그 노을 색깔에 더해서 더 노랗고 빨갛다. 오늘은 몸과 마음이 모두 움직이고 싶은 의지가 별로 없다. 그저 이층 침대 위에서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노을만 보고 있다. 일찍 자야겠다. 아주 오래전에 큰 안경을 썼던 전영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사 같다.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떠나간 그 사람은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렇게 쉽사리 떠날 줄은 떠날 줄 몰랐는데
한마디 말없이 말도 없이 보내긴 싫었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리고 12시가 되기도 전에 깼다. 코 고는 소리가 바로 옆과 앞에서 서라운드로….
왕재수
둘이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맨날 같이 다니다 보니 아이들 이야기도 이미 할 만큼 했고, 답이 없는 노후대책 이야기도 했고, 기후변화와 세계평화를 거쳐서 양가 부모와 자식들 한 명 한 명 모두 리뷰도 마쳤다. 그래서 이제는 까미노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사람들 리뷰를 시작했다. 잘 생긴 그 총각은 어디 출신이지? 그 사람들은 무슨 관계지? 그 사람은 어디서 뭐 하던 사람이지? 등등…. 그런데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은 계속 나타나고, 모두 다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갸는 어떻더라 하면 누가 누군인지 서로 이해를 못하곤 했다. 그래서 순전히 우리의 원활한 의사소통만을 위해서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네이밍을 해보았다. 예를 들면 군대에서 통신병이었던 분은 ‘통신병’, 기타 들고 다니면 ‘기타’, 얼굴이 좀 넓적한 분은 ‘넙데데’ 등등.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네이밍 했다면 뭐라고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톰과 제리(Tom and Jerry), 덤 앤 더머(Dumb and Dumber), 아니면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원 프리원(Buy one Free One)? 역시 좀 진부하지만 미녀와 야수밖에 없지 않을까?
까미노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A가 우연히 들었는데 어떤 한국사람 한 명이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까미노길은 자연도 좋고 공기도 좋은데, 왜 사람들이 냄새나는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가는지 이해가 안 간다….”
설마… 그 정도까지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아무리 소머즈의 [1] 초능력 귀를 가진 A라고 하지만 잘못 들었을 수도 있겠지 하고 나는 그냥 무시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지 며칠 후에 우연히 길에서 쉬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을 만났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잠깐 휴식을 한 후에 우리가 먼저 길을 나섰다. 그 덕분인지 우리는 그날 알베르게가 문을 열기도 전에 3등으로 도착을 했다. 알베르게 문 앞에 놓인 두 개의 배낭을 보고 우리도 그 뒤에 우리 배낭으로 대기줄을 세워 두고 근처의 공원 벤치에서 먼저 도착한 다른 순례자들과 같이 알베르게 오픈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2시가 되어 알베르게로 가니, 길에서 쉬면서 만났던 그분이 보인다. 그런데 그분이 분명히 죽 세워져 있는 몇 개의 배낭들을 멍멍무시하고 먼저 알베르게로 쑥 들어가더니 체크인을 한다. 당황! 알베르게에 우리보다 먼저 1등으로 도착했고 한국말이라고는 ‘안녕하세요’밖에 모르는 조단도 내심 당황했는지 우리에게 먼저 체크인하라고 양보까지 하려고 한다. 우리도 너무나 예상밖의 일이라서 뭐라고 조단에게 설명을 하지도 못하고,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 이런 ‘@.@SR%gdfs$ㅆ’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내심 쪽팔려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우치처럼 축지법을 쓰지 않는 한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우리가 도착해서 1시간 정도 이 근처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가 먼저 도착한 것은 지구가 둥근 것처럼 사실일 텐데.
A가 일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 사실로 확인이 되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들이 내 머리 위로 뱅뱅 맴돌았다.
저가의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잠도 안 잔다는 사람이 여긴 왜?
그런데 배낭줄이 있는 줄 알면서 도대체 왜 X무시하고 먼저 들어갔을까? 설마 이런 룰을 몰라서…? 그런데 그는 까미노길이 두 번째라고 했던 것 같은데?
물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또는 우리가 놓치고 보지 못했던 상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먼저 도착했다는 아주 확실한 증인(우리와 동료 순례자들)과 물증(우리 배낭)과 기타 상황 증거들을 종합한 후에 우리는 이 사람을 네이밍 했다. ‘왕재수’로.
왕재수의 똥매너는 그 후로도 그 이름값을 몇 번 더 한 것 같다. 살다 보면 왕재수를 만나는 일이 아주아주 가끔씩 생기기도 한다. 나는 이런 왕재수는 실제로 부딪히고 싶지도 않고 내 머리 어디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여기에 이렇게 적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왕재수는 제발 내 머릿속에서 그만 방 뺐으면 좋겠다.
[1] 요즘은 이분이 누구인지 모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예전 TV프로그램에 나온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이다. 낙하산 사고 후에 초초초첨단 수술 덕분에 한쪽 귀, 양다리, 한쪽 팔에 초능력을 가지게 된 유명한 여성분이다. 특히 멀리서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도청능력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