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hagun에서 El Burgo Ranero까지
나는 A와 함께 걷는다. A는 나보다 힘도 세고, 길도 잘 알고, 남의 말도 잘 듣고(청력이 좋다는 의미), 눈치도 빠르고 승부욕도 강하고, 집중력도 좋고 또 무엇보다도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다. 나는 A가 가끔 영화 “본아이덴티티”의 제이슨 본처럼 스파이 훈련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살상전투훈련은 제외하고….
까미노길을 걸은 지 며칠 후부터 A에게 몇 가지 새로운 습관들이 생겼다. 첫 번째, 우리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의 동선을 A는 수시로 스캔한다. 단순히 몇 미터 앞의 사람들이 아니라 저 멀리 개미크기로 보이는 사람들의 동선까지 파악하고 그 사람들이 걷는 루트와 다른 대체 루트들을 실시간으로 비교 분석한다. 얼마 전에 우연히 산책 중인 동네 사람들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다가 알게 된 지름길을 걸은 이후로 나타난 증상이다. 덕분에 조금 짧은 길로 걸은 후에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애초에 인간 내비게이터인 A덕분에 우리는 까미노길 절반을 넘어서 캄캄한 새벽길에서 길을 찾아 헤매기 전까지는 휴대폰 까미노앱에 있는 지도 기능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두 번째, A는 알베르게 숙소에서 같이 묵었던 사람들을 거의 모두 기억한다. 첫날 생장에 도착해서 까미노 사무소에서 만난 순례자들, 첫째 날 저녁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옆 침대에서 잔 프랑스 노부부, 유튜브 찍는 커플, 아이와 같이 걷는 모자, 기타 들고 다니는 호주 커플 등 이들의 침대위치와 그때 뭘 하고 있었는지도 기억하고 있다. 사실 그전에 바욘에서 생장으로 오는 버스에서 우리 앞과 옆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도 기억한다. 둘째 날 수비리 알베르게에서 우리 방에 묵었던 사람들이 어느 침대에서 누가 얼마나 코를 골았는지도 기억한다. 나도 바로 앞에는 피에르가, 왼쪽 대각선 침대에서는 안드레가 잤던 것 정도는 기억한다. 왜냐하면 같이 대화도 했었고 바로 내 침대의 앞과 대각선이니 기억하고 있지만 그 방의 잘 보이지도 않았던 구석 침대까지 누가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거의 편집증, 아니면 강박증에 가깝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 후에도 그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인지 기억한다. 본인이 그들과 직접 대화를 했거나 어떤 해프닝이 있어서 기억을 하고 있다면 나도 이해하겠지만 그냥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주변 상황을 모두 세세히 기억한다. 이건 영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의 특기이고, 알파치노와 콜린 파렐이 나오는 영화 ‘리쿠르트’, 한효주가 나오는 영화 ‘감시자들’ 등 모든 첩보영화에 나오는 스파이 훈련할 때 나오는 장면들이다.
세 번째, A는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출신, 직업, 사연 등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이태리, 프랑스, 호주, 미국, 콜롬비아, 브라질, 일본, 대만, 이스라엘 등등…. 일단 나는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일단 인사는 잘한다. 이름은 뭐니? 어디 출신 등 간단한 대화는 내가 잘 이끌어 가는 편인데 반면에 A는 옆에서 대충 웃어주고 대꾸만 한다. 그리고 둘이서만 걸을 때 조금 전의 대화를 복습해 보면 나는 조금 전에 대화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에 옆에서 경치만 보면서 걷던 A는 그 대화 내용을 다 기억해 낸다. 그러고 나서는 그가 며칠 전에 어디에서 다른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든지 하는 새로운 기억을 이끌어낸다. 마치 한효주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면서 머릿속의 기억들을 찾아내 짜 맞춰서 새로운 정보를 발견해 내듯이….
어제 아침에는 바에서 모닝 토스트를 둘이 먹고 있는데, 한국인 노신사 한 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다. 서로 눈이 살짝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날 이분을 길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한동안 같이 걸었다. 그분이 자기소개 하시기를 오래전에 까미노길을 한번 걸으셨는데, 당시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생장부터 부르고스까지밖에 걷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걷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쉬워서 다시 걷는 거라고 한다. 생장부터가 아니라 부르고스에서부터. 우리는 그분과 걸으면서 한동안 자녀교육에 대해서 한수 지도를 받다가 목적지 마을에 도착하자 각자 묵는 곳을 찾아서 ‘부엔 까미노’를 교환하면서 헤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A는 이제야 뭔가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A왈, 어제 아침 처음으로 그분을 바에서 보았을 때 우리와 인사를 하기 전에 바의 한쪽 구석에서 세요[13]를 찍었는데, 크레덴셜의 앞면이 아닌 뒷면에 세요를 찍어서 의아해했다고 한다. 엥? 이게 무슨 소리지? 다시 설명을 계속한다. 생장에서부터 출발한 우리도 아직 크레덴셜의 뒷면까지 넘어가지 않았는데, 그분이 부르고스에서부터 출발했다면 세요를 아직 몇 개 못 찍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아직 앞면에 세요를 찍어야 하는데, 벌써 뒷면으로 넘어간 점이 의심쩍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 생장에서부터 부르고스까지 절반을 걸었을 때 가지고 다녔던 크레덴셜을 이번에 다시 가져왔다면 뒷면에 세요를 찍는 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
A는 이상하다. 이상해…? 우선 바에서 한국분이 눈에 띄면 그냥 인사만 하면 될 터인데, A는 본인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인물이 레이더에 나타나면 ‘준위험인물’로 일단 분류해서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비논리적인 사실까지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A의 바로 앞에 앉아서 먹을 것만 있으면 즐겁게 열심히 먹기만 하는 순진무구 멍청한 나는 눈치도 채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러고 보니 A는 어디를 가든 주변 상황을 다 스캔하고 감지하고 있다. 정말 A는 시대를 잘 못 타고난 것 같다. 예전 MI6나 CIA나 KGB 같은 영문 이니셜의 조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다니던 냉전시대에 땅 덩어리가 큰 나라에서 태어났었다면 조국을 위해서 아주 큰 일을 했을 인물인데…. A가 ‘내’ 편이어서 정말 참 다행이다.
집에 돌아와서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일명 ‘사랑호르몬’이라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의 수치가 높으면 여성은 모성본능이 더 강하고 상대방에 대한 유대감, 신뢰, 배려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런데 옥시토신의 부가 작용 중의 하나는 이 호르몬 수치가 높으면 그 사람은 더 친사회적이고 또 그 집단에 대한 정보를 빨리 파악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A의 옥시토신 수치가 매우 높아 보인다.
또 사람은 진화과정에서 나와 다른 종족은 좀 더 빨리 알아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내 편보다는 남의 편이 나를 해할 확률이 높기 때문인 것 같다. 요즘은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어느 실험에 따르면 백인에게 여러 인종의 이미지를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만 보여주는 경우에 백인의 사진보다 흑인의 사진을 더 빨리 알아챈다고 한다. 이게 정말 맞다면 A는 요즘 정말 눈과 머리가 터질 지경이겠지? 피곤하겠다. 잘해줘야겠다.
난 참 운이 좋다.
열심히 걸었으니 편안하게 잠을 잔다는 것은 까미노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따로 예약을 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알베르게는 순례자가 도착하는 대로 원하는 위치의 침대를 선택하도록 해주기도 하고 호스피탈레로가 도착하는 순서대로 정해진 침대를 배정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층 침대가 이열 종대로 죽 나열되어 있는 큰 방에 배정을 받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이층 침대가 2~4개만 있는 작은 방에 배정을 받기도 한다. 작은 방에서 잔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이 적으니 코 고는 소리가 작을 수 있고, 방안에 땀 냄새가 덜 날 확률이 높다는 의미이다.
오니요스 데 카미노스(Honillos de Caminos)의 알베르게에서는 우린 이미 체크인을 했는데, 호스피탈레라가 순례자들이 거의 모두 도착했을 시간이 지나자, 우리를 여러 명이 같이 자는 도미토리에서 침대가 겨우 세 개만 있는 개인 룸으로 바꿔주었다. 울랄라!!! 프로미스타에서는 줄을 서서 차례대로 체크인을 하는데 내 바로 앞에서 큰 도미토리의 침대가 다 배정되어 버려서 우리는 이층 침대가 딱 두 개밖에 없는 작은 방으로 배정받았다. 그것도 옆 침대는 위아래 여자 순례자이니, 이 방에는 여자 세명과 남자는 나 혼자인 셈이다. 여자들과 같이 한 방을 사용한다고 해서 보통 우리가 0.1초 만에 머리에 떠올리는 이유로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좀 코를 덜 골기 때문에 좋은 편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꼭 작은 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제 사하군(Sahagun)에서는 욕조가 달린 개인 욕실을 완비한 2층 침대 두 개만 있는 4인실에 체크인하는 행운을 얻었다. 개인욕실을 보고 흥분하는 것도 잠시, 후에 체크인하는 젊은 프랑스 커플의 외모가 심상치 않았다. 몇 개월 전부터 걷기 시작했는지, 옷은 물론 배낭에서도 묵은 땀냄새가 났고, 밤새 침대를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우리가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던 개인 화장실을 지저분하게 사용하는 것은 물론, 화장실에서 흡연과 폭풍 코골이까지, 나는 까미노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로 이날 처음으로 밤에 잠을 설친 것 같다.
오늘은 조금만 걷고 알베르게 오픈 전에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헉! 어제의 그 사이좋은 커플이 알베르게 바로 앞의 바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오픈시간이 되니 이리 걸어온다. 이런…, 설상가상으로 까미노길을 자동차로 여행 중인 히피분위기의 프랑스인 다섯 명 그룹도 들어온다. 이런@.@×3! 이곳 알베르게는 도착순으로 원하는 침대를 선택한다. 우리는 이미 여자 한 명이 묵고 있는 이층 침대가 4개 있는 방을 선택했다. 그런데 우리 이후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역시 난 좋을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13] 까미노길은 ‘세요’라는 도장을 가는 곳마다 찍어서 본인이 이 길을 걸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보통 알베르게, 교회 또는 식당에서 찍는데, 하루에 3~5개 정도가 일반적이다. 생장 사무소에서 발행하는 크레덴셜에는 한 면에 8개의 도장을 받는 면이 앞쪽에 4페이지, 그리고 앞면을 다 찍으면 뒷면에 다시 4페이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