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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Expectation II

by BumBoo

2035년 4월 19일 자정.

묵직한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앨범 속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검은색 태블릿이 류세린의 손바닥 위에 차갑게 놓였다. 액정은 꺼져 있었지만, 그녀의 직감은 예리하게 진동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모든 것을 뒤엎을 결정적인 단서.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과 기대감, 그리고 어떤 거대한 예감으로 복잡하게 요동쳤다.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인 탐험가의 심장 박동 같았다.


숨을 고른 류세린은 태블릿의 전원을 켰다. 이내 잠금 화면이 나타났고, 8자리의 비밀번호 입력창이 그녀의 지성을 시험하듯 냉정하게 깜빡였다. 그녀는 차분하게 아버지가 설정할 법한 모든 숫자 조합을 대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일, 어머니의 기일, 아버지의 연구 시작일, 주요 논문 발표일… 이성과 논리에 기반한 수십 가지 시도가 차례로 '비밀번호 오류'라는 냉정한 메시지를 토해낼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거대한 미로 속에 갇힌 듯 답답함에 짓눌렸다.

창밖에서는 뇌를 뒤흔들 듯 퍼붓는 빗줄기가 도시 전체를 검은 그림자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고, 쏟아지는 빗소리는 마치 그녀의 심장 박동처럼 격렬하게 울려 퍼졌다. 밤은 깊어지고 새벽의 희미한 기척으로 바뀌어갔다. 이안의 사형 집행까지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은 시점. 연구실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그녀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압박감은 극에 달했다. 결국, 지친 이성이 팽팽한 끈을 놓는 순간, 그녀는 태블릿을 품에 안은 채 찰나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 그녀는 시간의 거대한 강물 위로 거슬러 올라가 다섯 살의 어린 자신이 되어 있었다. 삭막한 보육원의 풍경,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홀로 창가에 기대어 두꺼운 책을 읽던 고독한 아이. 어둠 속에 파묻혀 보였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비상한 총기가 번뜩였다. 보육원의 보모들은 그녀를 '부모에게 버림받은 천재'라고 수군거렸다. 때로는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음침한 아이'라는 경멸 섞인 수군거림도 들려왔다.


어느 봄날, 따스한 햇살이 보육원 창문을 비추던 오후. 한 부부가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 그곳을 찾았다. 아이들에게 정성껏 옷을 입히고 간식을 나누어주던 그들의 시선은, 유독 한쪽 구석에서 홀로 책에 몰두하고 있던 그녀에게 머물렀다. 바로 류현수 소장과 그의 자애로운 아내였다. 며칠 후, 류현수 소장의 아내는 남편을 설득했다.

"그 아이가 계속 제 눈에 아른거려요. 여보, 우리가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주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따뜻한 봄날의 그날, 어린 세린은 류현수 소장 부부의 품으로 입양되었다. 그녀의 인생에 다시는 없을 '가장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삶은 지독했던 보육원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보육원에서의 외로웠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새 부모를 '엄마', '아빠'라 부르며 새로운 가정에 놀라울 만큼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학교에 입학해서는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영재성을 뽐냈고, 모든 분야에서 완벽을 추구했다. 류현수 소장은 그런 세린이 그저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녀가 서울대학교 뇌인지과 학과에 수석 입학하며 자신의 후배가 된 후에야, 류 소장은 딸의 내면에 숨겨진 그림자를 보게 된다. 밤잠을 줄여가며 치열하게 공부에 매달리는 그녀의 비정상적인 집착 뒤에는, 부모에게 한 번 버림받았던 유년의 깊은 상처가 도사리고 있었다. '다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강박적으로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오직 자신과 류현수 부부의 인정만이 삶의 절대적인 가치였다.

병약하던 류현수 소장의 아내가 팬데믹 시기에 세상을 떠났을 때, 세린은 장례식 내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냉철했다.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슬픔조차 읽히지 않는 딸의 모습에 류현수 소장은 직감했다. 세린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감정을 직접 느끼고 표현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데이터처럼 분석하고 처리하는 독특한 뇌를 가졌으리라. 겉으로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냉정한 지성인이었지만, 그 차가운 지성의 가장 깊은 곳에는 오직 한 사람, 아버지 류현수 소장만이 그녀의 견고한 논리를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예외이자, 그녀의 세계를 지탱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심리의 모순, 즉 세상 모든 것을 논리로 해체하면서도 오직 한 존재에게는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이 역설이야말로 그녀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꿈속의 세린은 따뜻한 봄날, 류현수 박사 부부의 집으로 처음 향하던 길을 걷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은은한 꽃향기, 그리고 마침내 갖게 된 '자신의 방'에 대한 행복한 설렘. 잠시 후,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잠 속에서 미소 짓던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꿈속에서 얻은 강렬한 영감에 홀린 듯, 그녀는 태블릿에 손을 뻗었다. 꿈에서 선명하게 각인된 8자리의 숫자가 뇌리를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그 숫자를 입력했다.


‘20050420’

그녀가 류현수 소장의 품에 안겨, 비로소 그의 딸이 된, 따뜻한 봄날의 그 날짜였다.

딸깍!

육중하게 잠겨 있던 태블릿의 화면이 섬광처럼 환한 빛을 내뿜으며 마침내 활짝 열렸다.


태블릿에는 류현수 소장의 연구일지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딸이 이 태블릿을 열어볼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연구일지의 첫 장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사랑하는 내 딸, 세린아.


네가 이 메시지를 읽고 있다면, 아마 아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뜻일 거야. 미안하다, 우리 세린이에게 이런 아픔을 남겨서. 아빠에게 세린이는 세상의 그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단다. 항상 너를 믿었고, 너의 총명함을 자랑스러워했어.


아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네가 보육원에서 아빠에게 안겨왔던 그 순간이었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아빠의 텅 비어있던 세상은 온통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찼단다. 마치 '세상을 맑게 비추는 빛'처럼 아빠의 삶에 찾아온 너였기에, 네 이름도 '세린'이라고 지었지. 너와 함께한 모든 날들이 아빠에게는 더없이 빛나는 선물과 같았어.


이 태블릿 안에는 아빠가 지난 3년간 몰두했던 연구 기록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단다. 중요한 내용들이 많아서 보안에는 정말 신경을 많이 썼어. 그래서 파일들은 한 달 단위로만 열어볼 수 있도록 해두었으니, 조금은 답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세린아.


그리고 다음 달 기록을 보려면, 아빠가 남긴 작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거야. 세린이가 어릴 적 냉장고에 붙은 수학 문제들을 눈을 반짝이며 풀어내던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구나. 그때처럼, 너의 비범한 지성이라면 분명 이 모든 퍼즐을 해낼 수 있을 거야. 이건 너를 향한 아빠의 마지막 사랑이자 무한한 믿음이란다.


아빠는 언제나 너를 믿는다, 우리 세린이. 아빠는 항상 너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야.


사랑한다, 내 딸 세린아. 영원히.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류세린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 그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지금의 그녀가 있게 한 사람. 세상에서 그녀가 존경하는 유일한 인물. 그렇기에 그녀는 반드시 류 소장의 죽음의 뒤에 감춰진 진실을 밝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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