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도연 ㅡ 비행 교관

by Park

"도대체 왜… 외우지를 않는 거야?"


같은 학생과 1:1 그라운드 수업을 열한 번쯤 반복했을 때, 단 한 줄을 외우게 하려던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닿았고, 말이 날카롭게 튀어나갔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국인 학생은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90일, 이륙 3번, 착륙 3번. 이게 그렇게 외우기 어려운 숫자와 단어인가? 심지어 너의 모국어인데. 티를 내지 않으려 작게 심호흡을 하며, 침착한 톤으로 다시 말했다.


"혹시 뭐가 어려운 건지 알려주면, 내가 도와줄게."

"아니야. 오늘은 내 머리가 그만 기능하고 싶대."


억지 미소를 지으며 학교 컴퓨터를 건드렸다. 시스템에 접속해 오늘 이 학생과의 수업기록을 남겼다.


[열한 번째 수업. 항공규정 암기 필수.]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다음 비행수업을 위해 램프로 걸어 나갔다. 우리가 오늘 배정받은 비행기가 저 멀리 보였다.


비행기 옆에서 열심히 Pre-Flight(비행 전 외/내부 점검. 보통 학생이 최소 한 시간 전 미리 도착해 완료한 후, 교관과 함께 재점검한다.) 하고 있어야 할 내 중국인 학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계를 확인했다. 하늘엔 구름이 조금 껴있었지만 충분히 훈련할 수 있는 날씨였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무런 연락도, 이쯤 되면 와있어야 할 Weight and Balance(연료·승객·화물 등을 고려해 비행기의 안전한 무게와 균형을 계산하는 작업. 날마다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도 와있지 않았다.


[어디야?]


곧바로 답장이 왔다.


[오늘 날씨가 비행 못할 것 같아서. 아직 집이야.]


순식간에 이너피스를 외치던 마음이 무너지며 분노가 치솟았다.


[당장 학교로 와.]


당연히 그날 비행은 취소였다. 우리의 비행기 렌트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학생은 이제 집에서 출발했고, 준비할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아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날씨가 좋지 않아 보여도, 비행기의 상태가 의문스러워도, 아직 배우고 있는 학생으로서 확신할 수 없으니 늘 준비를 해놓고 상의 후 결정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교관인 우리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날씨를, 이제 훈련 2주 차인 학생이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거지? 이건 그저 태도의 문제다.


젊은 꼰대라고 날 놀리던 친구들이 떠올랐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천진한 표정으로 그제야 학교에 나타난 학생을 조용한 브리핑룸에 앉혀놓고 가만히 쳐다봤다.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스케줄 관련 우리 학교 규정이 어떻게 되지?"

"최소 한 시간 전 도착, Pre-Flight과 Weight and Balance를 마쳐놔야 해."

"거기에 예외는 있나?"

"없어. 하지만 오늘 날씨가…"

"지금 밖에 날씨 어때?"


학생은 브리핑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쳐다봤다. 화창했다.


"날씨가… 좋아."

"이곳 날씨는 순식간에 바뀌어. 안개가 깔렸다가도 순식간에 걷힐 수 있고, 화창하다가도 우박이 쏟아질 수 있어. 아무도 예상 못해. 근데, 너처럼 섣불리 날씨가 안 좋다고 판단하고 비행준비를 해놓지 않았다가 갑자기 날씨가 좋아지면, 어떡할래?"


학생은 말이 없었다.


"그땐 날씨 때문이 아닌 순전히 너의 준비부족, 태도불량으로 그날 훈련할 기회를 놓치는 거야."


사실 더욱 화가 나는 건 그런 식으로 비행 스케줄을 하나 잃는다면, 훈련기회를 놓치는 건 우리 둘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행학교엔 기체 수가 정해져 있고, 교관 수도 정해져 있다. 한 교관은 여러 명의 학생들을 동시에 담당한다. 우리가 예약해 놓은 탓에 그 비행기를 쓸 수 없었던 다른 누군가, 또 내가 오늘 이 시간에 이 학생과 비행하기로 결정했기에 훈련을 받지 못하는 내 다른 학생들이 있다.


비행기도 놀고, 교관도 놀고, 다른 내 학생들도 놀게 되는 거다. 나는 더 성실하고 절실한 다른 학생들에게 훈련 기회를 주고 싶다.


"무조건 제시간에 나타나 네 비행기를 준비해 놓는 게 파일럿의 기본이야. 예외는 없어."


사실 예외도 있다. 틀림없이 오늘은 비행을 못할 것 같은 상황이라면, 나 역시 학생들에게 미리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은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그건 성실하고 이미 태도가 좋은 학생들이 헛걸음하지 않길 바랄 때 하는 배려다. 이렇게 벌써부터 요령 피울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예외는 없다.


학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은 풀이 죽은 뒷모습으로 학교를 나섰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비행 출발시간 10분 전이 되어도 날씨가 처참해 절대 훈련을 할 수 없는 날.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고작 몇 미터 앞에 있는 사람의 형체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그때 그 학생에게 오늘 비행은 날씨로 인한 취소라고 문자를 보내곤, 학교 라운지를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친한 교관인 진우가 날 보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라운지 안으로 들어왔다. 늘 해맑은 사람이다.


"오늘 날씨 장난 아니지?"


함께 창 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램프를 내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기되어 있는 비행기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 학생들은 학교에 오긴 왔는데 역시나 아무 준비도 안 해놨더라고. 자기들이 봐도 오늘 비행 못 나갈 거 같았던 거지."


진우는 다시 생각해 봐도 웃기다는 듯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근데 저 안갯속에서 사람 한 명이 걸어 나오는 거야. 저 안갯속에서! 처음엔 사람인지도 몰랐어."

"그래?"

"응. 뭐 하고 오는 길이냐니까 프리플라잇 하고 들어오는 길 이래. 그래서 나도 옆에 있던 내 학생들한테 저 학생을 본받으라고, 너무 훌륭한 학생이라고 막 박수를 쳐줬지."

"이 날씨에? 성실하네."

"그래서 너네 교관 누구냐고. 잘 가르쳤다 하니까, "

"응."

"도연 이래."


마지막 내 이름을 끝으로 진우는 참아오던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웃음이었다.


나 역시 너털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딘가 꽉 막혀있던 마음이 어이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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