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 ㅡ 학생 파일럿
아침 5시. 비행학교 라운지에 앉아, 긴장된 마음으로 저번 수업 때 배운 걸 복습하고 있었다. 내 비행 스케줄은 6시 반이니 시간은 딱 적당했다.
어젯밤에 다려놓은 유니폼을 입고 가벼운 화장까지는 금방 했지만, 머리를 묶는 단계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밤늦게 대충 올려 묶은 머리는 늘 예쁜 거 같은데, 왜 꼭 외출 전에 머리를 묶으려 하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아침 6시. 이쯤 되면 오실 때 됐는데. 학교 정문을 한번, 시계를 한번 더 확인하는 순간 휴대폰에 알림이 울렸다. 교관님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좋은 아침, 옆 집 강아지가 탈출해서 같이 잡아주느라. 오늘 비행은 취소해야겠어.]
눈을 질끈 감았다. 짜증이 치솟았다. 저번에는 갑자기 비행시간이 헷갈렸다고 취소하질 않나, 늦잠을 잔적도, 그냥 잠수를 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매번 그리 웃는 얼굴로 나타나는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이젠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내 페어(Pair), 이른바 비행짝꿍과 치프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몇 달간 참아오던 우리 교관의 불성실함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러 찾아간 것이었다. 나는 달력에 우리 교관이 비행을 당일캔슬한 모든 날짜를 빨간 줄로 그어서 가지고 갔다. 그렇게 모아서 보니 한 달 중 절반 이상은 교관의 노쇼로 가득 차 있었다.
말솜씨가 좋은 내 페어가 치프에게 열심히 영어로 실망감을 쏟아냈다. 나 역시 준비해 온 달력을 증거자료 제출하듯 내밀었다. 치프는 담담한 표정으로 듣더니, 확인해 볼 테니 나가보라고 말했다. 내 달력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내 쪽으로 다시 밀었다.
미국인들은 절대 본인의 직원을 남들 앞에서 헐뜯지 않는다. 사실 관계가 어떻든, 우선은 기필코 감싸며 편을 들어준다. 알고야 있었지만, 우리는 조금 맥이 빠진 채 치프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그런 소문이 들렸다. 우리의 교관님이 치프 사무실로 불려 갔고, 닫힌 문틈으로 치프의 고함소리가 새어 나왔다고.
약 일주일 뒤, 우리의 교관자리는 여전히 공석이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새 교관이 배정되기 전, 임시교관과의 비행 스케줄이 잡혔다. 우리가 고발한 첫 번째 교관님과 똑같은 금발은 가진… 친동생이었다.
첫 만남부터 임시 교관님의 못마땅함이 어느 정도 느껴졌고, 나 역시 비행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어찌어찌 비행을 잘 마치고 내려왔다고 생각했을 때, 그러니까 비행기를 밀어야 할 때가 왔을 때, 나는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날 응시하고 있는 교관님을 마주했다.
보통은 함께 비행한 동료나 교관이 꼭 비행기를 같이 밀어주는데, 오늘 저 교관님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비행기엔 바퀴가 달려있더래도 약 1,000kg쯤 되는 비행기를 혼자 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램프엔 경사도 있었고, 나는 고작 50kg쯤 나가는 마른 체중에 속했다.
앞바퀴에 tow bar(경비행기 파킹 시 방향조절을 위해 앞바퀴에 거는 쇠막대기)를 채운 채, 반대손은 프로펠러에 올렸다. 나 역시 저 도발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있는 힘껏 비행기를 밀었다. 아주 천천히 비행기가 밀리기 시작했다. 직선으로 밀기만 하면 그나마 쉽겠지만, tow bar로 방향을 꺾어 비행기를 90도 돌리며, 경사 위로 비행기를 정확히 밀어 넣어야 했다.
다리가 떨리고 땀에 젖은 유니폼 셔츠가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잠시 멈춰 고개를 들었다. 비행기 각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역시나 정해진 자리에 한 번에 넣기엔 각이 틀렸다. 다시 힘을 줘 비행기를 앞으로 당겼다.
곁눈질로 보아도 교관은 본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양 팔짱을 낀 채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tow bar 각도를 조절하고 밀기 시작했다.
'그냥 자존심 버리고 도와달라고 할까.'
그렇지만 자신보다 어리고 체구도 한참이나 작은 동양인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구는 건 봐줄 수가 없었다. 자존심 상하게 지고 싶지 않았다. 약한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인은 끈기 아닌가. 몇 번을 헛발질을 하더라도 저 인간한텐 도와달라고 하지 않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형의 복수랍시고 이렇게…
"Do you need help?"
정신이 번쩍 드는 친절한 목소리였다. 램프를 지나가던 다른 미국인 교관이 의아함과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즉시 미소가 번지며 'Sure!'을 외치려던 그때,
"No, she's fine."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우리 임시 교관이 무미건조하게 그랬다.
난 어금니를 꽉 물고 다시 비행기를 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