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지 않은 우울증

우울증의 정도와 정도

by grassrain

꿈은 다 큰 어른이 돼야 펼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른은 그리 쉽게 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 같이 흔하디 흔한 어린이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주 머나먼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어린 애일 줄 알았다. 그리하여 꿈을 가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대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되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었다.


인어공주가 되고 싶었다.

이야기 듣는 건 좋아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나에게 흥미로운 책 읽기에 대한 기억은 예쁜 그림의 동화책에서 끝이 났다. 그런 나에게 인어공주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한참을 읽어보고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언니들을 뒤로하고 물거품으로 변하고 있는 인어공주의 모습이었다. 용감하고 멋진 남자와의 성대한 결혼식으로 끝맺는 여느 다른 공주 이야기들과는 달리, 묘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자기 몸보다 몇 배는 크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는 어여쁜 공주들의 드레스 모양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던 집중력과는 달랐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이었으리라. 인어공주의 결말은 오랫동안 떠올랐다. 그렇다. 내가 되고 싶은 건 정확히 물거품이었다. 성대를 빼앗겨버려 소리 내어 울부짖지도 못한 채 칼을 가슴에 품고 다리부터 물거품으로 변하는 인어공주. 좋아하는 왕자를 죽이지 못해서 되어버린 그 물거품. 그림 속의 물거품들은 무지개색 비눗방울처럼 하늘로 아름답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색색의 물거품처럼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 후로 문득 인어공주가 되고 싶을 때, 화장실로 가서 세숫대야에 물을 받았다. 수도꼭지로 받아내는 물보다 샤워기를 비스듬히 틀었을 때 물거품은 더 많이 생긴다. 뽀글뽀글. 물이 대야 가득히 차오르기 시작하면 대야 안에 손을 짚어 넣고 휘젓는다. 마구마구. 불규칙하면서도 빠르게. 크고 작은 물거품들이 더 많이 생겨난다. 너무 오랫동안 지켜볼 순 없다. 엄마에게 한소리 듣기 전에 끝내야 한다. 세숫대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감는다. 동화책처럼 물거품으로 변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대야 밖으로 넘쳐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친구들에게도 인사한다.

“안녕. 친구들아~ 반가웠어. 잘 가… 다음에 또 보자!” 하수구로 들어가고 난 후의 모습은 상상되지 않아 항상 실망스럽다.


나에게 의식이 생기고 기억력이 시작되는 시기에 살았던 아파트는 단지의 제일 끝 동에 살았을 때다. 1층이었지만 앞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어 하늘이 꽤 잘 보였다. 거실 겸 안방이었던 방에서 앞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빨래를 널고 개는 엄마 옆에서 여동생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참을 웅크리고 있던 등을 곧게 펴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하늘이 보인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즐겨 부르고 듣는 동요처럼 파아란 하늘에 하이얀 양구름들이 뭉게뭉실 모여 떠다니고 있다. 새로 튼 솜이불같이 폭신해 보이고 몽글몽글 멋지면서도 귀여운 구름모양이다. 구름 끝의 흩어지는 모양새들을 보는 재미에 빠져 넋을 놓고 본다. 문득 보이지 않는 구름 위쪽과 안쪽이 궁금해진다. 너무너무 궁금해진다. 저기에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구름 가까이 가기만 한다면 구름을 실제로 밟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간절히 가보고 싶어진다. 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눈물이 났다. 심지어 줄줄줄 흘렀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놀랐다. 어서 눈물을 멈춰야 한다. 잘한 게 없는 아이는 울면 안 되는 시절이었기에 엄마에게 들키면 엄청 혼날 테다. 넘쳐흐르는 물들을 막아내고 도로 집어넣어야 한다. 역시나 새는 물을 막는 건 어리숙한 나에겐 역부족이었는지 콧물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함께 새어 나왔다. 엄마의 시선을 끌어버렸다. 들켰다.

엄마는 뜬금없이 우는 나에게 갑자기 왜 우냐고 날카롭게 묻는다. 잠깐 생각해 본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뜸을 들이니 답답한 엄마는 빨리 대답하라 독촉한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구름 위에 엎드려서 우릴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아”

커다란 구름을 가리키며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너무 생각난다고 덧붙여 말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얼굴도 잘 모르면서, 외할머니와의 기억도 하나 없으면서 말이다. 엄마는 내 대답에 설득이 된 건지, 더 묻기 귀찮은 건지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이런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준 건 아마도 외할머니 귀신이 도와줘서 일거라 생각했고, 그 뒤로도 종종 뜬금없는 눈물이 흘렀을 때 얼굴도 모르는 외할머니를 몇 번 더 들먹였다. 엄마에게 혼날 일은 무사히 피할 수 있었지만, 눈물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딱히 울 일도 없었고, 엄마에게 혼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눈에서 물이 흘러내렸는지… 시간이 한참 지나 어른이 된 후에도 그 눈물의 정당함을 찾기 어려웠다.


항상 앞이 아닌 바닥을 보며 걸었다. 걷다가 보물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초등학교시절 친구의 말은 바닥을 보며 걸어 다닐 명분으로 충분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물웅덩이로부터 내일 신을 신발을 지키기 위해 더더욱 바닥을 주의 깊게 살피며 걸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보이는 지렁이를 피하느냐 더 집중해야 했다. 만져보고 싶은 보드라운 털도 없고, 눈코입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도 알 수 없게 징그럽고 못났으니, 가까이 다가가 볼 생각도 안 했다. 게다가 지렁이와 내 이름에 겹치는 단 한 글자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렁이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물선생님께서 지렁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땅을 비옥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고마운 생물이다. 지렁이가 하는 일은 땅 속에서 흙을 먹어 정화시킨 후 깨끗한 흙으로 배설한다. 지렁이가 많을수록 땅이 깨끗할 것이다. 장마철에 지렁이를 길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여러 이유 중엔 숨을 쉬러 나오는 것도 있다. 어쩌면 흙이 빗물에 쓸리고 떠밀려 나오게 된 지렁이를 괴롭히지 말아라. 너무 징그러워하지도 말거라. 없으면 안 될 고마운 존재이다. 학교에서 지렁이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렁이가 보인다. 피하지 않고, 서서 가만히 바라본다. 지렁이가 부러워졌다. 나도 멋진 일을 하는 지렁이가 되고 싶어졌다. 생물이라면 으레 하는 먹고 싸는 일이거늘, 지렁이가 하면 지구를 위한 일이 된다니… 사람에게 혐오와 괴롭힘을 받으면서도 훌륭한 업적을 쌓고 있었다니… 될 수 있다면 지렁이가 되고 싶어졌다. 지금은 아니 되니, 하는 수 없이 다음 생엔 지렁이로 태어나고 싶다. 밝은 날에는 땅 속에서 먹고 싸고 먹고 싸며 생물선생님에게 칭찬받고, 비 오는 날에는 길만 잃지 않는다면… 혹은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 눈에만 띄지 않으면 지금의 내 삶보다 훨씬 편하고 살 만해 보였다. 지렁이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졌다.

정신과에 다니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평소 나의 기분 상태가 일반인들보다 낮아 기본적인 정신적 에너지도 적은 편이고, 쉽게 우울감에 젖어든다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울증으로 살아왔을 거라며, 약복용을 강력하게 추천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을 들었다. 크게 걱정 안 해도 되는 상태라는 소견을 기대하고 간 두 번째로 내원한 날이었다. 놀라웠다. 당황스러웠다. “저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사람이 항상 기분 좋고 행복할 순 없잖아요. 저 약 먹을 정도로 그렇게 우울하지 않아요. 극단적으로 우울한 것도 오래 전이에요. 지금 약 먹을 정도는 진짜 아니에요. 명상하고 산책하면 괜찮아지는 게 아니에요??” 나의 반문에 답해주시는 전문가는 역시 전문가였다.

스스로를 고독한 걸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차분하고 조용한 시간 속에 묻혀 있으면 편하고 안정된 느낌이 든다. 사람이 항상 웃으며 즐거울 순 없지 않나? 보통 어른이 되면 크게 웃을 일도 없다 하지 않나? 하지만 칫솔질과 세수를 하기 위해 타이밍을 재고, 리모컨을 잡는데 숱한 고민과 크나큰 다짐이 필요하다면? 음식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밖에 나가기를 며칠 동안 고민한다면, 그건 고독을 즐기는 게 아니라 우울한 거다. 정신과약을 먹게 되고, 전문의와 이야기하면서 깨달았다. 집에 혼자 있는 걸 유난히 좋아하고 게으름 피우는 것이 나에겐 에너지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더 나아가 보통의 삶을 충분히 살아내고 나이가 든 노인들을 부러워하는 건 흔치 않은 생각이었다. 장례식장 입구에 있는 고인들의 얼굴을 보며 내 얼굴이 있다면을 상상하기에 난 아직은 젊은 나이다. 죽음을 앞두고 누워있는 노인의 모습들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죽고 싶다 ‘ 거나 ’ 사라지고 싶다 ‘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우울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난 완벽한 우울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