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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길 맨발 걷다. 7-1코스

제주 월드컵 광장, 엉또폭포, 고군산, 하논지구등

by 신피질

오늘 제주 산간에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다. 아침 8시 서귀포 중앙 로터리 버스 정류장에 있다.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린다. 도시의 출근길 아침은 비가 와도 부산하다.

짐을 숙소에 맡기고 우산만 들고 나와서 몸이 가볍다.


어제 비에 젖은 양말을 신고 한참 걸었더니 엄지발가락 근처에 작은 물집이 생겼고 그것을 터뜨렸다.

물집은 장기 도보자의 필수 과정의 하나 일 것이다.


7-1코스는 출발장소는 월드컵 경기장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6코스 종점이고 7코스 시작점인 서귀포 올레 센터로 다시 오는 코스다. 제주 월드컵광장 7-1코스 시작점은 숨은 보물 찾기처럼 찾기가 어렵다. 1코스와 달리 버스 정류장에 길표시가 없다.


올레길 수첩을 보니 월드컵 광장이라고 쓰여있지만 광장이 넓어서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이곳저곳 살폈지만 보이지 않는다. 백여 미터 걸어서 스타디움 입구까지 갔어도 올레길 표식은 전혀 없다.


7-1 표시를 한 사람은 마지못해 했거나 올레길에 별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 같다. 비가 와서 리본도 젓고 시야도 흐려서 잘 안보였는지 모른다.


(제주 월드컵 광장 )


간밤 폭풍우로 가로수 잎이 많이 떨어졌다. 서귀포 가로수는 이름을 모르지만 빨간색 작은 열매가 가득 달려있어, 나무에 붉은 꽃이 핀 것 같다.


월드컵 경기장 위쪽 오르막 길은 깨끗한 아파트와 무성한 나무가 줄지어 있어 평화롭고 온화한 느낌이 든다.


다시 사거리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길 건너 리본은 있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표시가 없다. 한참 만에 전봇대 위쪽에 감추어진 리본을 봤다. 다는 사람이 달기 편한 곳에 매단 것이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짐을 숙소에 나 두고 오기를 잘했고, 고무신발을 신은 것이 다행이다.


아스팔트를 벗어났다. 비 오는 날 작은 도로는 빗물의 시내로 변한다. 빗물이 모여 내려오면서 경사진 곳은 갑옷결처럼 오각형 무늬를 띄고, 평탄한 곳은 빗 방울이 떨어지며 축포를 터트리고 작은 분수를 만든다. 무수한 분수가 작은 빗물의 시내에서 축포가 되어 터진다.


새들도 대체로 조용하지만 개구쟁이 새끼들이 재잘거리는 듯하다.

어릴 적 소나기가 내리던 날 텅 빈 마을 좁은 골목길에 친구들과 발가벗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큰 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면 에너지가 확장된다. 나무 끝을 보려고 고개를 들고 가슴을 쭉 펴서 걷게 된다. 높게 솟은 나무 아래를 웅크리고 걸어가면 죄지은 사람 같다.


조금 전 아파트와 이곳 높은 나무 우거진 숲이 친숙한 이유를 알겠다. 10여 년 살았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분위기와 비슷하다. 비 오는 날 깨끗한 도로, 집과 높이 솟은 나무가 있는 곳에서 내 젊음의 많은 시간을 보내서 매우 친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찬 비는 감귤나무를 흠뻑 적시고 흘러내린다. 이파리에 매달린 빗방울은 지금 막 올라온 감귤 꽃봉오리와 섞여서 하얀 좁쌀 같다.


비가 거세어 가파른 작은 도로는 빗물이 급류처럼 흐른다. 어제 산 고무 신발은 전천후 수륙양용 전차와 같이 돌진한다. 이런 날은 비싼 방수용 등산화도 무용지물이다. 신발은 값싼 것이 건강에 좋을 듯하다.


난 맨발 옹호론자다.

마누라는 맨발에 기겁하고 또 싸구려 샀다고. 싸구려 사서 금방 버린다고 잔소리를 하겠지만 말이다.

이젠 마누라 말 안 듣는다.


엉또 폭포 오르는 길은 폭우가 쏟아져 빗물의 강과 같다. 강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간다.

폭포입구에서 우비와 먹거리를 파는 포장가게가 있어, 빨간색 우비를 사서 입고 어묵 하나를 먹었다.


비 오는 날 엉또 폭포는 압권이다. 올레 수첩 7-1코스에 비 오는 날 엉또 폭포가 소개되어 있다.


( 비 오는 날 엉또 폭포 )


폭포는 정방 폭포와 비슷한데 굵은 물줄기가 한 개 더 많은 세갈레 길이다. 폭포의 떨어지는 포말이 물안개가 되어 연기처럼 옆으로 퍼져 나간다. 폭포 위의 우거진 밀림은 온통 하늘을 뒤덮었다.


강인한 식물종이 폭포 바위에서 번식하며 연녹색으로 하늘을 빽빽하게 덮고 웅장한 스테레오 사운드를 만든다.


멋진 풍경이다.

빗줄기가 굵어도 폭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관광객은 도착하자마자 모두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폭포옆에 작은 휴게소가 있고, 무인 판매대가 있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차 한잔을 했다.


엉또 폭포를 지나서 오름을 오르기 전에 길을 잘못 들었다. 왼쪽으로 가라는 표지판을 못 보고 1킬로를 지나쳤다가 되돌아왔다. 제주 올레길은 표시가 이백미터만 없어도 잘못 간길이다.


오름을 다시 맨발로 오른다. 숲의 안개가 자욱하다. 땅은 촉촉이 젖어 맨발로 밟으니 흙이 으깨어져서 발바닥 사이로 흙이 비집고 올라온다. 안개 자욱한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걷다 보니, 가장 걱정되는 것이 멧돼지다.


멧돼지가 나타나서 갑자기 공격하면 어떻게 할까? 고무 신발을 던져서 쫓을까? 분홍색 우비를 입어 멧돼지가 소처럼 흥분해서 공격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조언처럼 멧돼지가 달려들면 우산을 펴면 되지 않을까? 나무사이로 요리조리 피해 돌아도 될듯하고...


하지만 멧돼지 공격은 기우다. 1년에 멧돼지 받힌 사람이 전국에 몇 명이 될까? 확률로 보면 복권 1등 당첨보다 더 어렵다. 멧돼지가 호랑이처럼 나를 식량으로 잡아먹을 것도 아니고, 내가 저를 잡아 바비큐 하려고 공격할 것도 아닌데, 피차 괴롭힐 일이 뭐 있겠는가?


고근산 오르는 길은 매트 공사하려고 길을 파헤쳐 흙길이 진흙탕이다. 땅을 밝으면 뭉클한 진흙이 발목까지 차고 오른다. 고군산 정상은 서귀포 8경의 하나로 서귀포 해변 70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비가 쏟아지고 운무가 가득해 백 미터도 안 보인다.

( 안개 낀 호젓한 길 )


고군산을 지나면 하논지구가 나온다. 하논지구는 세계 최대 수상화구 분화구로 5만 년 이후 지구 동식물 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전된 곳이다. 그곳에 있던 하논 마을은 4.3 사건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3의 흔적은 올레길 곳곳에 있다.


하논분지에는 제주도에서 보기 힘든 논이 있다. 올레길은 논에 있는 농수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논두렁은 추억의 길이다. 논은 물이 가득 있다. 아직 모는 심어져 있지 않고, 잡풀만 있다. 맞은편에 두루미 떼 수십 마리가 있다. 이모작은 하지 않는 듯하다. 과거에는 귀한 땅일지 몰라도 지금 감귤 농장에 비하면 저렴한 땅일 것이다.


(하논 분화구 표지판 )


서귀포 새내 공원에서 뜻하지 않게 매화 농원을 지났다. 매화나무를 한 두 개 보았지만, 이렇게 수백 그루가 있는 매화 농원을 보는 행운을 얻다니.


매화나무는 한국인의 나무다. 중국인이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도화나무를 좋아한다면, 한국인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나무를 좋아한다. 도학자 황희는 마지막 유언으로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고 했다 한다.

시인 이육사는 매화 향기 가득한 광야를 꿈꾸지 않았던가?


비에 축축이 젖은 매화나무를 보니, 줄기는 굽은 곡선이 없고 모든 곧은 직선이다. 가지가 옆으로 뻗을 때는 굽지 않고 꺾였고, 줄기는 회색과 갈색이 아닌 검은색에 가깝다.

잎은 부드럽고 온화한 연녹색이며 가지마다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할 정도로 달린 열매는 초록의 매끈한 타원형이다.

나는 언제 매화나무를 옆에 두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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