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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주자소 설치 — 세계최초,최고 조선 인쇄기술

by 신피질

태종 3년, 1403년. 새 왕조의 질서가 정립되던 시절, 태종은 세상에 없던 기관 하나를 세웠다. 이름하여 주자소(鑄字所) — 글자를 주조하는 곳, 곧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는 관청이었다. 이 한 기관은 이후 500년 조선 문명의 핵심이 되었고, 세계 인쇄사의 기준점으로 남았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새로 주자소를 설치하였다. 임금이 나라에 서적이 매우 적어서 유생들이 널리 볼 수 없는 것을 염려하셨다, 이에 명하여 주자소를 설치하고 예문관 대제학 이직, 총제 민무질, 지신사 박석명, 우대언 이응을 제조로 삼았다. 내부의 동철을 많이 내놓고, 또 대소 신료에게 명하여 자원해서 동철을 내어 그 용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이 구절은 조선 인쇄문화가 단지 기술이 아니라 지식의 공공성을 염두에 둔 국가사업이었음을 보여준다.

주자소의 조직은 작지만 정밀했다. 활자 주조를 맡은 주자장, 서체를 다듬는 서자장, 인쇄와 교정을 담당하는 인쇄장, 종이와 먹을 관리하는 공인(工人) 등 약 30여 명 남짓이 국가 인쇄를 담당했다. 그들이 다룬 금속활자는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정밀기계 부품에 가까웠다.

당시 금속활자 제조는 놀라울 만큼 과학적이었다. 구리, 납, 주석을 일정 비율로 섞어 합금을 만들고, 밀랍이나 점토로 글자 모양을 새긴 뒤 주조틀에 붓는다. 식힌 뒤 다듬고 높이를 맞춰 활판 위에 배열하면, 일정한 압력으로 종이에 찍을 수 있었다. 활자 하나의 높이는 8~10mm 정도로 균일해야 했고, 글자마다 서체와 크기를 달리해 대·중·소 활자를 만들었다. 작은 경전용 활자부터 큰 교서용 활자까지 활자의 표준화·세분화 체계가 이미 15세기에 완성돼 있었다.

인쇄 부스 또한 존재했다. 주자소의 인쇄장은 환기와 채광이 좋은 목조건물로, 먹을 갈고 종이를 적시는 인쇄대가 놓여 있었다. 종이 위에 먹을 바른 뒤, 나무 손잡이가 달린 인쇄틀로 눌러 찍는 방식이었다. 하루 인쇄량은 숙련된 장인 기준으로 수십 장에 달했다. 이런 정밀한 인쇄 과정은 구텐베르크보다 반세기 앞서 체계화된 것이었다.

이 기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고려 시대에 『상정예문』(1234)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고,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는 『직지심체요절』이 찍혔다. 『직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태종의 주자소는 이 고려 기술을 제도적으로 계승하고 국가 차원의 체계를 세운 기관이었다.

직지심체요절 가상 3D



중국의 목판 인쇄와 비교하면 차이가 명확하다. 중국은 이미 8세기 당나라 때 목판 인쇄술을 발전시켜 불경과 사상서를 대량으로 찍었다. 그러나 한 글자라도 틀리면 새로 나무판을 새겨야 했다. 수정과 교정이 불가능했고, 제작비가 컸다.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글자를 따로 조립할 수 있어 교정이 쉽고, 반복 사용이 가능했다. 닳은 활자는 녹여 다시 주조할 수 있었기에 재활용 체계 또한 완벽했다.

더 서쪽의 이슬람 세계는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꾸란과 철학서를 손으로 필사하며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중시했다. 필사는 신앙적 행위였으나,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인쇄는 오히려 ‘신의 말씀을 기계로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교해 보면, 조선의 주자소는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앞선 기술적 체계를 갖춘 기관이었다. 1403년 조선은 이미 활자 주조·보관·인쇄·재활용 시스템을 국가적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었고, 유럽의 구텐베르크는 아직 인쇄기를 고안 중이었다.

다만 조선의 인쇄문화가 ‘폐쇄적’이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태종 이후 세종은 주자소를 적극 활용해 농서·의서·천문서·역법서 등 실용지식을 대대적으로 간행했다.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칠정산』 등이 그 대표작이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는 금속활자로 한글 인쇄를 시도하며 문자 보급의 폭을 넓혔다. 세종은 기술을 지배의 수단이 아닌 백성 계몽의 수단으로 사용한 왕이었다.

조선이 경직된 사상체계로 변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17세기 이후 송시열과 같은 성리학자들이 주도한 사상체계는 학문의 다양성을 억누르고, 인쇄물을 ‘정통 경전’ 중심으로 제한했다. 이때부터 주자소의 인쇄물은 현실보다 교리를 위한 책이 많아졌고, 지식의 확산은 점차 관료 중심으로 축소되었다. 즉, 기술은 변하지 않았지만, 사용자의 의식이 변했던 것이다.

주자소는 이후 계미자, 갑인자, 병자자 등 세대를 거듭하며 정교한 활자체계를 완성했다. 계미자는 구리와 납의 합금비율을 조정해 내구성을 높였고, 세종대의 갑인자는 활자 크기를 세분화해 시각적 균형을 확보했다. 활자마다 미세한 각도를 달리해 먹의 번짐을 최소화하는 기술까지 도입되었다. 인쇄 품질은 당시 유럽 인쇄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결국 태종의 주자소는 단순한 기술기관이 아니라, 국가의 지식 인프라였다. 활자는 움직였고, 그 위에 얹힌 생각들은 시대마다 달랐다. 태종은 지식을 통제의 수단으로, 세종은 그것을 민본의 도구로 썼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은 그것을 이념의 방패로 삼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조선의 금속활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로, 정밀함과 체계성 면에서 구텐베르크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그 활자들은 조선의 사상, 예술, 행정, 그리고 백성의 언어까지 새겼다. 태종의 주자소는 결국 ‘기술과 사상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인류 문명의 가장 깊은 역설을 남긴 위대한 실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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