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종, 언어의 과학자 — 천지인으로 세계를 기록하다

by 신피질

조선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세종실록》은 짤막하게 이렇게 기록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여 초·중·종성으로 나누고, 이를 합하여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와 본국의 속어를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간단하지만 변화가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단 한 문장이지만, 인류 문자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신의 순간을 남긴 기록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체는 분명히 세종이었다. 실록의 문장 속에는 ‘친제(親制)’, 즉 임금이 스스로 창제하였다는 표현이 명확히 등장한다.
집현전 학사인 정인지 최항 박팽년이 세종의 명에 따라 창제취지와 사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을 1446년 집필했지만, 설계와 원리는 세종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는 단순히 백성을 위하는 인문군주가 아니라,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음운학자이자 과학자였다.




세종은 소리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경서와 더불어 천문, 지리, 의약, 음악에 두루 통달했고,
특히 ‘율려(律呂)’라 불리는 음률 체계를 깊이 연구했다. 《세종실록》에는 “임금이 음률의 수를 헤아려 황종의 율을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율려는 소리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다. 일정한 비율로 길이를 바꾸어 음정을 조율하는 원리로, 오늘날의 주파수 개념과 같다.
세종은 박연을 불러 음악의 음률을 재정비하게 했고, 자신도 직접 음관(音管)의 길이를 계산하며 실험에 참여했다.
이 ‘소리의 수학’에 대한 이해는 곧 훈민정음의 구조적 원리로 이어졌다.

훈민정음의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ㅁ은 입술, ㅅ은 이, ㅇ은 목구멍이다.
모음은 하늘(ㆍ), 땅(ㅡ), 사람(ㅣ)을 본뜬 천지인의 철학으로 구성되었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형태를, 모음은 발음의 방향과 열린 정도를 상징했다.
이런 체계는 단순한 직관의 산물이 아니라, 음성기관의 과학적 관찰에 기초한 설계였다.
세종은 소리의 조형 원리를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음양오행의 질서로 해석한 최초의 언어학자였다.

영국의 문자학자 존 딕슨(John Dixon)은 “훈민정음은 단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 완성된 세계 유일의 문자 체계”라고 평했다.
문자 대부분은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의 관습 속에서 서서히 만들어졌지만, 훈민정음은 한 시대의 한 사람의 사유로 완성된 인류사적 기적이었다.
그가 동양의 문헌 전통과 음운학, 철학, 과학을 융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음소문자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세종은 문자학사상 유일무이한 존재다.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 역시 실록에 짧지만 분명히 남아 있다. “본국의 속어를 모두 쓸 수 있다”는 구절은,
세종이 백성의 말이 문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한문 중심의 관료 체계 속에서, 백성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글로 옮길 방법이 없었다. 세종은 그 불편을 ‘가엾게 여겨’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에서도 그 철학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함이라.”

세종의 이 결단은 단순한 문자 창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식의 민주화’이자, 언어를 통한 사회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혁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성리학이 조선의 절대 이념으로 굳어지면서 한문이 다시 권력을 독점했다.


일부 대신들은 “언문은 천한 글”이라 비판했고, 훈민정음은 공식 문서에서 사라졌다. 대신 불교 경전 번역과 여성들의 서간문, 민요와 소설 속에서 조용히 살아남았다.
세조 시기에는 불경 언해본이 간행되었고, 성종 때에는 “훈민정음은 우리나라의 글자이니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명이 내려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한글은 민중과 여성의 언어로 뿌리내렸고, 결국 19세기 갑오개혁 이후 ‘국문(國文)’으로 공식 부활했다.

훈민정음은 주자학적 권위에 눌려 수백 년 동안 그림자 속에 있었지만, 민중의 손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궁중 부녀자의 편지, 불경 언해, 민요와 판소리, 한글 소설이 그 불씨를 이어 주었다. 왕이 만든 문자가 백성의 언어로 생존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 언어학계는 훈민정음을 ‘음성기관의 구조를 기반으로 한 세계 유일의 과학 문자’로 평가한다.
그 중심에는 세종의 과학적 사고와 인간 중심 철학이 있었다.
그는 음향의 원리를 음악으로 탐구하고, 언어의 본질을 과학으로 풀어내며, 인간의 소통을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훈민정음은 단순히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소리와 철학,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질서로 엮은 사유의 산물이다.
세종은 소리를 통해 인간의 세계를 해석했고, 그 세계를 문자로 남겼다.
그가 남긴 스물여덟 글자는 지금도 한국인의 사고와 문화의 뼈대 속에 살아 있다.

keyword
이전 10화태종의 주자소 설치 — 세계최초,최고 조선 인쇄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