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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강우 계측기, 조선의 측우기 이야기

by 신피질

1441년 어느 봄날, 궁궐 한켠에서는 막 주조를 마친 청동 그릇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세종의 맏아들, 세자 이향—훗날 문종이 되는 그는 반복되는 가뭄과 장마 속에서 농업국가 조선의 불안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걱정하고 있었다. 벼농사는 물이 많아도 망하고 적어도 망한다. 비는 곧 백성의 생존이자 국가 재정의 토대였다. 그런데 그 중요한 비의 양을 ‘감(感)’으로만 판단하는 조선의 현실은 그에게 늘 불안이었다.


세자는 땅을 파서 스며든 깊이를 재던 기존 방식의 한계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토양에 따라 스며드는 속도가 달라 정확한 비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발상을 바꾸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그대로 받아 재면 어떨까?” 이렇게 구리로 만든 원통형 그릇이 궁중에 놓였고, 조선은 인류 역사 최초로 비의 양을 ‘숫자’로 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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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세종실록》에 그대로 남아 있다. 실록은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빗물을 받는 구리 그릇을 만들어 시험했다”고 기록한다. 이 기록은 측우기의 발상과 첫 실험의 주체가 바로 세자 문종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측우기가 세종의 치세 아래에서 완성된 것은 맞지만, 그 근본적 아이디어와 설계의 뿌리는 세자에게 있었다.


하지만 조선 측우기의 장점은 ‘발명’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진짜 혁신은 뒤에 이어졌다.


1442년, 측우기는 길이·지름·재질 등 모든 규격이 표준화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각과 그친 시각을 기록하도록 했고, 잰 깊이는 주척으로 분 단위까지 측정해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오늘날 기상청이 사용하는 표준 관측 방식과 거의 동일한 시스템이 15세기 조선에서 이미 완성된 것이다.



조선은 이 규격을 서울에만 두지 않았다. 같은 규격의 측우기와 자를 지방 관아에도 보내 전국 단위의 기상 관측망을 구축했다. 한양 관상감의 측우대를 ‘국가 표준 기준점’으로 삼아, 지방 관측값의 이상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단순한 과학 기구가 아니라, 국가적 데이터 수집·비교·정책반영 체계였다.


서양에서 최초의 강우량계는 1639년 이탈리아의 Castelli가 만든 기구로, 조선보다 200년 가까이 늦다. 또한 조선처럼 전국 단위로 보급하고 운영 규정을 마련한 사례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조선의 측우기는 단순한 ‘최초 발명품’이 아니라, ‘세계 최초의 국가적 기상관측 제도’로 평가된다.


왜 조선만 이런 발명을 했을까?


그 답은 조선의 국가 운영 방식에 있다. 조선은 철저한 농업국가였다. 비의 양은 곧 국가의 세금, 군량, 재정의 규모를 결정하는 절대 지표였다. 또한 조선은 세계적으로 드문 ‘기록국가’였다. 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각종 등록은 자연현상과 정책결정을 촘촘히 기록했다. 하늘의 변화를 예감이나 징조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데이터’로 바라보려는 토양이 이미 잡혀 있었다.


여기에 세종·문종의 과학 정책이 더해졌다. 둘은 천문·역법·관측·도량형 표준화를 국가의 근본 기반으로 여겼다.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 같은 천문기기와 시계가 만들어졌고, 도량형은 전국적으로 통일되었다. 측우기는 이 과학기술 행정의 정점에 놓인 기구였다.


측우기 데이터는 실제로 농업 행정 전반에 활용되었다. 강우량이 적으면 수확이 감소할 것이므로 세금을 줄여야 하고, 많이 오면 홍수 대비를 해야 했다. 제방 보수, 수리(水利) 시설의 유지·보강, 국가 비축미 방출, 지역 간 양곡 이동까지 모두 측우량을 기반으로 결정되었다. 어느 지역이 가뭄을 겪고 있는지, 어느 지역이 장마 피해를 입었는지, 조선은 감각이 아닌 객관적 수치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측우기는 백성의 삶을 지키는 ‘국가의 감각 기관’이자, 조선이 세계 최초로 구현한 ‘데이터 기반 행정’의 상징이었다. 16~17세기 전란을 거치며 많은 측우기와 측우대가 유실되었지만, 영조 때 다시 전국적으로 재건되었다. 대구 선화당 측우대, 금영 측우기 등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물들은 그 재건된 체계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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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측우기는 조선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 사건이었다. 비는 더 이상 징조의 대상이 아니라 계량 가능한 정보였고, 국가는 그 정보를 기반으로 정책을 세웠다. 과학기술, 행정철학, 농업경제가 만나 탄생한 조선의 측우기는 세계 과학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상 데이터 인프라’였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시간대별 강우량과 레이더 영상을 손쉽게 확인한다. 하지만 그 근원에는 15세기 조선의 궁궐에서 식어가던 청동 그릇 하나가 놓여 있다. 세자 문종이 빗물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 순간, 조선은 하늘을 바라보는 나라에서 하늘을 읽어 다스리는 나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측우기는 그 변화의 출발점이었고, 세계 최초이자 가장 과학적인 강우 계측기라는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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