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 태종이 시행한 치안 전쟁
대마도는 일본보다 한반도에 훨씬 가깝다. 부산에서 불과 50km 남짓 떨어진 이 작은 섬은 일본 영토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조선의 치안과 직결된 주변국이었다. 섬의 90%가 산지로 이루어져 농업이 불가능했고, 이 고질적 빈곤은 대마도가 조선과의 무역에 생존을 의존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교역이 단절되거나 기근이 닥칠 때마다 대마도에서는 해적(왜구)이 결집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왜구의 침입은 고려 말부터 본격적으로 심각해졌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고려·조선 100여 년 동안 왜구의 침입은 수백 회에 달했다. 남해안과 서해안의 어촌과 포구는 끊임없이 습격당했다. 『세종실록』은 “근래 그 횡포가 더욱 심하다(近來其橫暴益甚)”고 기록한다. 왜구의 본거지는 대마도였고, 이는 국가 안보와 백성 보호의 문제였다.
1419년의 대마도 정벌은 갑작스런 생각에서 나온 결단이 아니었다. 그 뿌리는 고려 시대에 이미 있었다. 1389년 고려 창왕은 장수 박위를 보내 대마도를 공격하게 했고, 왜구의 선박을 소각하며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대마도의 구조적 빈곤과 일본 중앙정부의 통제력 부재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왜구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 초기 태종은 국가의 치안을 가장 중요한 국정 과제로 삼았다. 그는 즉위 이후 해군력을 강화하고 병선을 확대했으며 화포와 화약 체계를 정비했다. 대마도 정벌 또한 태종 재위 기간부터 꾸준히 검토되었으며, 준비의 대부분은 태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1418년 세종이 즉위했지만, 국정 전반은 상왕 태종의 통제 아래 있었고, 1419년의 대마도 정벌 역시 태종이 주도한 군사작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세종실록』 1년 5월 26일에는 다음 기록이 있다.
“이종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모든 군사를 통솔하여 대마도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命李從茂爲都體察使, 統率諸軍, 討伐對馬賊)
도체찰사는 평시에 존재하지 않는 임시 최고사령관으로, 육군과 수군을 모두 지휘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전쟁 총사령관이었다. 이종무는 태종이 수년 간 준비해온 군사 기반 위에서 세종의 명령을 받고 역사적 정벌에 나섰다.
1419년 6월, 조선 수군은 227척의 대함대와 17,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비록 거리는 가까웠지만, 장마철 난풍과 쓰시마 난류는 험악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해류와 풍세를 정밀하게 계산하며 상륙에 성공했다.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군이 대마도에 이르니 적이 화살과 돌을 날려 싸웠으나, 우리 군이 분전하니 적이 달아났다.”
(軍至對馬, 賊出以矢石拒戰, 我師奮擊, 賊走)
조선군은 왜구의 거점을 불태우고 선박을 파괴하며 근거지를 초토화했다. 그리고 대마도주는 조선군의 압도적 전력 앞에 항복을 요청한다. 조선군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왜구에게 납치되어 끌려갔던 조선 백성 다수를 되찾아 귀환시켰다.
그러나 모든 과정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6월 26일, 좌군 절제사 박실이 산 속 매복한 적에게 기습을 당하며 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특히 편장 박홍신은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고, 그의 희생으로 나머지 병력은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작은 패전은 조선 조정에 군 지휘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럼에도 전쟁의 큰 흐름은 조선의 압도적 승리였다. 귀환한 군대를 향해 백성들은 북을 치며 환영했고, 국가적 숙원이던 치안 문제는 드디어 해결될 기미를 보였다.
정벌 이후 대마도주는 조선에 장문의 탄원문을 보내왔다. 그는 “무고한 상인과 사신들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고, 심지어 “대마도가 어디에 속하느냐는 왕의 덕에 달려 있으며 반드시 일본에만 속할 필요는 없다”고까지 밝혔다. 이는 대마도가 조선에 얼마나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결국 1443년, 세종은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와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마도는 조선의 해상 질서를 인정한다
— 무역과 조공은 조선이 정한 규범에 따른다
— 대마도주는 조선에 신하적 예를 행한다
대마도는 일본의 번(藩)이면서도 조선의 속국적 성격을 가진 이중적 지위가 되었고, 대한해협의 해상 질서는 조선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1419년 대마도 정벌은 단순한 군사 보복이 아니라, 국가의 치안 회복, 해양 주권 확립, 그리고 동아시아 해상 질서 재편이라는 전략적 의미를 지닌 전쟁이었다. 그것은 고려에서 시작되고, 태종이 준비하며, 세종대에 완성한 100년에 걸친 국가적 과업이었다.
세종은 백성의 평안과 국가의 안위를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그 결단은 조선왕조실록 속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