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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북방 개척, 한반도 국경을 완성한 위대한 작업

4군 6진 개척 (김종서 / 최윤덕 장군 )

by 신피질

1440년대 함경도 북부, 아직 지도 위의 선이 굳어지기 전의 세계.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이 공간은 조선도 명나라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 여진의 땅이었다. 사냥과 이동을 생업으로 삼던 그들의 삶은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고려 말까지 이 지역을 지켜온 오래된 북방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 속에서 이 지역은 점점 국가의 통제력이 작동하지 않아,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국경은 흐릿했고, 여진은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과 사냥을 반복했다. 세종은 이 공백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단순히 영토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병화를 막기 위해 국경의 질서를 새롭게 세우고자 했다.


세종은 먼저 최윤덕을 도원수로 삼아 파저강 이북의 여진 세력을 제압하도록 했다. 최윤덕은 문관 출신이었지만 군사적 판단과 실행력이 뛰어난 장수였다. 그의 원정은 4군 설치의 기반을 만들었고, 압록강 상류에 자성·우예·무창·허륜이 세워졌다. 산악지대인만큼 산성 중심의 방어체계가 구축되었고, 조선의 북방 진출이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김종서가 등장한다. 그는 세종이 전적으로 신뢰한 문신이었지만, 실전에서 누구보다 강한 장수였다. 두만강 북쪽을 조사하고 성곽을 세우라는 명을 받은 그는 종성·온성·경원·경흥·부령·회령의 6진을 완성했다. 여진의 끊임없는 습격 속에서도 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켜 농토를 개간했다. 이 과정은 전투와 노동이 뒤섞인 치열한 개척사업이었다.


4군 6진 개척.png

당시 국제 정세도 세종의 북방 정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명나라는 요동까지만 통치했고, 압록강·두만강 이북은 여진의 부족지대였다. 명은 조선이 그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을 오히려 환영했다. 실제로 명나라의 사신은 “여진은 우리에게도 말썽이니 조선이 알아서 다스리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4군·6진 지역에는 원래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조선에 귀화 하여 조선의 법과 문화를 받아들였고, 조선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또 일부는 조선과 혼인하며 문화적으로 융합되었다. 반면 조선의 통치를 거부한 여진은 북쪽으로 이동하거나 조선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 변방은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가 만나 충돌하고 섞이는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이 지역을 단순한 군사 요충지가 아니라, 조선의 새로운 생활공간으로 만들었다. 특히 6진은 평지성과 읍성 중심으로 조성되어 농경이 가능했고, 주민 정착과 행정체계가 완비되었다. 이러한 실효지배는 결국 한반도의 북쪽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고정시켰다.


이 국경은 이후 500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다. 정묘·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조선에게 여러 조건을 요구했지만 4군·6진 반환은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만큼 세종이 만든 북방 경계는 조선의 영토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세종은 영토를 실질적으로 확장한 왕이다. 고려 말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확보했고, 고구려 이후 가장 북쪽으로 국경을 밀어 올렸다. 그는 문자를 만들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성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틀을 완성한 군사전략가이자 공간 설계자였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의 형태는 세종의 결단 위에 서 있다. 북방의 공백을 채우고 백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국경을 세운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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