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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문화, 다음 세대를 위한 구조 설계에 대하여

5부 희망을 그리다 - 사람과 사회를 위한 경제

by 신피질

나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한 세대의 시간을 건너온 어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한국 사회의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요즘 따라 한 가지 질문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과연 다음 세대에게 어떤 터전을 물려줄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무너져가는 공교육과 과열된 사교육의 풍경이다. 학교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꾸벅꾸벅 졸고, 방과 후에는 학원으로, 또 다른 학원으로 이동한다. 유치원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이미 아이들의 하루는 ‘타임테이블’에 맞춰 쪼개져 있다. 그 사이에 아이가 자기 생각에 빠져볼 틈, 의미 없는 장난을 마음껏 쳐볼 틈,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며 상상할 틈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부모 세대의 불안은 여기에 기름을 붓는다. 집값은 오르고, 안정된 일자리는 줄어들고, 승자독식의 구조는 더 심해졌다. 모두가 “내 아이만은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믿게 되는 순간, 교육은 경쟁과 비교의 전장으로 변한다. 그 결과 사교육비는 젊은 세대의 자본 축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지금의 사교육비 지출이 20~30년 뒤 노후 빈곤의 원인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도 든다. 만약 그 비용을 장기적인 저축이나 우량 자산에 투자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중산층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돈만이 아니다. 그 내용이 입시와 점수, 순위에 지나치게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AI 시대에는 정답을 빨리 맞히는 능력보다,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질문을 던지며, 여러 관점을 조합해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하지만 현재의 사교육은 아이에게 ‘질문하는 법’이 아니라 ‘틀리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실패하지 않는 법, 남들보다 앞서가는 법, 안전하게 평균보다 위에 서는 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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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단계의 풍경은 더 안타깝다. 언어와 사고, 정서와 사회성의 기초가 형성되는 0~6세 시기에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국어의 확장, 몸으로 부딪히는 놀이, 다양한 사회적 경험이다. 모국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좋은 표현을 많이 알고, 여러 이야기를 접할수록 아이의 마음속 세계는 깊고 넓어지며, 그것이 곧 사고의 지평으로 자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중요한 시기에조차 조기 영어, 조기 수학, 한글 선행이 교육의 중심에 서 있다. 주변은 온통 한국어인데, 정작 모국어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경험은 밀리고, 아직 의미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는 외국어와 추상적 개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과연 이것이 아이의 인생 전체를 두고 보았을 때 도움이 되는 길일까.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서양 철학과 위인전, 다양한 소설을 읽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경제·역사·사상과 관련된 책들을 탐독하며 친구들과 토론도 자주 했다. 책과 토론은 세상에 대한 관점을 넓혀주었고, 내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할지에 대한 감각을 길러주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정의와 자유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품게 해 준 것도 결국 그런 경험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가 놓여 있는 환경은 다르다. 속도와 자극에 익숙한 숏폼 영상과 알고리즘이 주의를 끌어당기고, 상업화된 K-컬처는 강렬한 감각을 제공하지만 깊은 사유로 연결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역사와 철학,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담론보다, 먹방과 예능, 감각적 욕망을 부추기는 콘텐츠가 화면을 대부분 채운다.


사고를 깊게 하는 독서는 점점 더 ‘힘든 일’이 되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뒤 느끼는 그 묘한 성취감과 뇌의 활발한 활동이 주는 기쁨은 경험하기 힘든 것이 되어간다. 생각하는 능력이야말로 삶을 깊게 성찰하고 스스로 길을 찾는 힘인데, 우리는 그 능력을 키울 기회를 사회적으로 점점 줄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교육의 현장에서도 비슷한 모순이 반복된다. 정규 교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평가를 관리하는 틀 자체가 이미 시대와 어긋나 있다. 교사는 정해진 진도와 평가 기준에 묶여 있고, 학교는 여전히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지식은 이제 인터넷과 온라인 강의, AI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는 시대다. 학교가 지식 공급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뒤에도 제도는 여전히 지식 전달 중심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니, 학생들은 학교에서 잠을 자고 학원에서 공부하는 뒤틀린 이중구조가 생겨버렸다.


여기에 정치적 분열과 이념 대립이 교육을 끌어들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 정책의 방향은 흔들리곤 했다. 교과서 내용과 입시 제도, 교육과정의 철학이 몇 년 단위로 바뀌다 보니, 공교육에 장기적인 신뢰를 갖기 어렵다. 어떤 부모는 국가의 교육 시스템을 믿기보다 스스로 사교육을 선택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이념의 충돌과 지역감정의 잔재는 교육을 미래로 향한 사회적 합의의 장이 아니라, 정치 싸움의 연장선으로 만들기도 한다. 교육은 본래 다음 세대를 위한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되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유아·초등 교육의 성별 불균형도 생각해 볼 지점이다. 지금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사 대부분은 여성이다. 아이를 돌보고 보살피는 능력에서 여성 교사가 가진 강점은 분명 크다. 그러나 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이 다양한 유형의 어른을 만나고 여러 역할 모델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도전과 실패를 함께 겪어주는 어른, 위험을 함께 판단해 주는 어른, 규칙과 원칙을 몸으로 보여주는 어른, 감정과 공감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어른이 모두 필요하다.


그 역할이 지나치게 한쪽 성별에 치우치면, 아이가 경험하는 세계의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남성 교사의 비율을 높이고, 다양한 성향과 배경을 가진 교사들이 함께 아이를 만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단지 성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인지와 정서 발달을 위한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구조를 설계해야 할까. 거창한 국가 전략이나 완벽한 청사진을 말하기 전에, 나는 출발점이 부모라고 생각한다. 결혼과 출산 이후, 양 부모가 반드시 ‘부모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국가는 이 과정을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


0~6세 아이의 뇌와 마음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국어와 놀이와 사회적 경험이 왜 중요한지, 조기 영어·조기 수학이 어떤 한계를 가지는지, 비교와 불안이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아이를 ‘경쟁의 수단’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내용들은 부모에게 체계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특히 오랜 시간 아이와 함께 보내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동등한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아이의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들이 한 사람의 불안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가 부모의 어깨에서 조금씩 짐을 나눠 들어줄 필요가 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육도 크게 바뀌어야 한다. 유치원 시기에는 글자와 숫자보다 놀이가, 정답보다 상상과 질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흙을 만지고, 나뭇가지를 주워 장난감을 만들고, 친구와 다투고 화해하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세계를 배워가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 모국어로 이야기를 만들고, 자신이 본 세상을 말과 글로 표현해 보는 경험 속에서 언어는 깊이를 얻는다.


초등학교에서는 암기 위주의 수업 대신 프로젝트형 수업, 관찰과 탐구를 기반으로 하는 수업, 토론과 발표를 통해 생각을 나누는 수업이 점차 중심이 되어야 한다. AI 시대에 필요한 능력은 “AI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AI가 제공하는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질문을 던지고,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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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차원에서는 교육에 대한 장기적 계획이 필요하다. 정권이 바뀌어도 쉽게 손댈 수 없는 독립적인 교육위원회를 만들고, 교육을 정치적 전리품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생존 전략으로 다루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검증된 교육 전문가와 현장 교사, 학부모와 학생이 함께 참여하는 구조 속에서 20년, 30년 단위의 교육 철학과 방향을 합의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몇 년마다 제도가 바뀌는 혼란은 줄어들 것이다.


극단적인 상상일지 모르지만, 교육부 장관을 세계에서 가장 앞선 교육 시스템을 가진 나라의 전문가에게 일정 기간 맡기고, 대신 정치권은 그 철학을 존중하며 꾸준히 밀어주는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누가 임명되느냐’가 아니라, ‘어떤 철학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느냐’ 일 것이다.



문화와 미디어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처럼 온통 먹방과 자극적인 예능, 감각적 소비만이 화면을 채운다면, 아무리 학교에서 철학과 역사를 가르쳐도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다. 공영방송과 공공 플랫폼이 책임감을 가지고 좋은 책과 강연, 사회적 담론과 미래에 대한 토론을 꾸준히 다루어주는 환경이 필요하다. 깊이 있게 생각하는 일이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멋있고 매력적인 일이라는 새로운 문화 코드가 만들어져야 한다. 상업적 K-컬처의 에너지와 창의성 위에, 사유와 품격을 겹쳐 올리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사회 전체의 문화 수준도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학교 안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업과 조직 문화 역시 함께 바뀌어야 한다. 학교에서 질문과 토론을 장려하고 창의적 문제 해결을 강조하더라도, 사회에 나가 만나는 조직이 여전히 서열과 침묵, 눈치 보기만 강요한다면 젊은 세대의 역량은 다시 눌려버릴 것이다. 수평적 소통과 실패에 대한 관용, 다양한 전공과 경력을 존중하는 인사 시스템은 교육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반드시 고민해야 할 과제다. 지금처럼 법학전문대학원이나 의대에 인재가 과도하게 몰리고, 특정 직업만이 ‘안전한 삶’으로 인식된다면, 교육 현장에서 아무리 창의성을 이야기해도 공허한 구호로 끝나고 말 것이다.


나는 교육 전문가도, 정책 입안자도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의 부모로서, 현장에서 기업과 사회를 지켜본 세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이제 남은 생을 글쓰기로 정리해 보고 싶은 사람으로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다음 세대가 단지 돈과 스펙만을 좇는 삶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 정의와 자유, 도덕과 공동체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 AI와 로봇이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신하게 되더라도, 인간이 더 많은 시간을 서로를 돌보고 배우며 행복을 나누는 데 쓸 수 있는 사회. 그 출발점은 학교의 교실이 아니라, 부모의 품에서 시작되고, 사회 전체의 문화와 구조 속에서 자라나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한 세대를 사교육과 경쟁, 불안과 비교의 에너지로 소진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세대만큼은 다른 길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교육과 문화,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한 터전 설계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지금 우리 각자가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그 질문을 다시 꺼내 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 역시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 글을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작은 메모처럼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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