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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비밀 1부 — 세포 속의 우주

by 신피질

기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 모든 순간은 사실 고도의 철학적 행위가 아니라,뇌속 이온의 농도차가 만들어내는 전기적 파동이다. 뉴런의 막전위가 변하면 신호가 축삭을 타고 전해지고, 시냅스에서는 화학물질이 방출된다. 이 단순한 물리·화학의 언어가 860억 개의 뉴런과 100조 개의 시냅스 사이에서 교차할 때, 인간은 생각하고, 보고 느끼고 듣고, 기억하게 된다. 전기적 패턴의 반복이 곧 기억이 되었고, 그 흔적이 쌓여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진다.

그 가운데에서도 기억의 형성을 이끄는 핵심 구조가 있다. 바로 해마(hippocampus)이다. 해마는 바다에 사는 ‘해마(seahorse)’를 닮아 그런 이름을 얻었고, 새로운 기억이 처음 통과하는 관문이자 뇌 전체에 흩어져 저장될 정보의 ‘주소’를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해마는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정보의 경로를 설계하고 연결하는 지도에 가깝다. 그래서 해마가 손상되면 오래된 기억은 남아있어도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한다. 기억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늘 흐릿하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 나는 몸이 약해 운동장에 나가도 뛰지 못해 바람 없는 구석에서 선생님의 외투를 덮고 앉아 있었다. 시험에서 100점을 자주 받아 선생님이 나를 무등 태워 교실을 돌았던 순간, 그리고 좋아하던 같은 반 여자아이가 작은 알사탕을 손에 쥐여주고 얼굴을 붉히며 달려가던 장면도 있다. 모두가 지금 생각하면 흑백의 정지화면처럼 흔들리며 떠오른다.

이런 기억이 흐릿한 이유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다. 그 시절의 해마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고, 장기기억을 정교하게 조직하는 신경회로도 미완성 상태였다. 그러나 이 미완의 구조 속에서도 감정이 실린 순간—따뜻한 외투의 온기, 무등을 타던 기쁨과 부끄러움, 알사탕의 당도처럼 짧은 떨림—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는다. 이는 감정 중추인 편도체가 더 강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편도체는 강한 감정의 순간에 즉시 깨어나 “이건 저장해야 한다”는 신호를 해마로 보낸다. 이 신호는 해마 내부의 신경 연결을 더 강하게 만들고, 패턴을 굵게 만든다. 감정은 기억의 접착제이며, 우리가 어떤 기억을 평생 갖게 되는지는 감정의 강도와 거의 정비례한다.

기억이 해마에 저장된다는 오해도 많지만, 실제로 기억은 대뇌피질 전체에 분산 저장된다. 시각은 후두엽, 청각은 측두엽, 감각은 두정엽, 언어는 전두엽과 측두엽의 특정 영역에 저장된다. 해마는 이 흩어진 조각들을 연결해 하나의 ‘장면’으로 묶어주는 조율자로, 기억 형성의 핵심 회로를 설계하는 존재이다.

새로운 정보는 먼저 해마의 입구인 치상회(DG)에 들어와 초벌 스케치처럼 분류된다. 이후 해마 내의 CA3 영역에서 연관성이 강화되고, CA1에서 더 정교한 패턴으로 다듬어진다. 감정이나 의미가 깊은 순간이면 시상하부가 호르몬을 분비하고, 이 호르몬들은 다시 해마와 편도체의 활동성을 높여 기억의 강도를 더욱 높인다. 시상하부가 만들어 내는 스트레스 호르몬, 각성 호르몬, 성호르몬 등은 모두 기억 형성의 방향과 깊이를 바꾸는 생물학적 스위치다.

이렇게 해마 내부에서 형성되는 미세한 패턴을 엔그램(engram)이라 한다. 엔그램은 특정 기억을 담고 있는 신경세포들의 집합이며, 최근에는 특정 엔그램 세포를 활성화해 잊힌 기억을 되살리거나 억제해 일정 기억을 차단하는 실험까지 가능해졌다. 이는 기억이 단순한 심리적 기록이 아니라, 물리적·생물학적 구조라는 강력한 증거다.

이 엔그램을 강화하는 과정이 장기강화(LTP)이다. 반복된 경험이 시냅스를 굵게 만들고, 신호 전달을 더 빠르게 하며, 결국 기억을 안정화한다. 그러나 LTP가 강하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많은 세밀한 기억이 남는 사람은 오히려 과거에 묶여 살게 되고, 현실을 왜곡해 바라볼 수 있다. 기억의 풍요가 삶의 편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적당한 망각은 오히려 삶을 더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고 감정적 균형을 유지하게 한다.

장기기억 메커니즘



기억은 결국 생존을 위한 뇌의 전략이다. 반복된 학습을 더 빠르게 만들고, 에너지를 덜 소모하게 하고, 위험과 기회를 신속하게 판단하게 돕는다. 우리는 이 패턴의 세계 덕분에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고 살아간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이 인간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힘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해마의 치상회(DG)는 인간 뇌에서 거의 유일하게 평생 새로운 신경세포가 생성되는 곳이라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도 배움이 늦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서, 운동, 걷기, 새로운 학습, 사색, 대화는 모두 뇌세포 생성과 시냅스 형성을 촉진한다. 뇌는 나이를 먹지만, 자극을 받으면 언제든 다시 젊어진다. 배움과 호기심은 철학적 구호가 아니라 해마의 생물학적 요구다.

기억은 전기적 패턴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구성하는 서사다. 감정, 호르몬, 경험, 생각이 결합한 통합적 작용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성장하며 변화한다. 기억은 나의 그림자이자 나의 빛이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탱하는 가장 깊은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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